줄리언 바지니 『위기의 이성』

  이 책은 최근의 인문학 트렌드와 달리 너무 가볍지도, 그렇다고 너무 무겁지도 않은 인문학 교양서라 할 수 있다. 철학 중에서도 논쟁적이고 까다로운 주제들을 골라서 철학이 우리 사회 전반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주목해온 줄리언 바지니. ‘비합리적 세상에서 합리적 회의주의자가 되는 법’이란 부제에 걸맞게, 혼란스런 시대에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이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러나 위기에 빠진 이성을 구하는 게 아니라 이성을 더 극한으로 몰아 실용적 측면에서 사고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올바르게 ‘이성’에게 다가가는 것이 우리 시대의 중대한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는다.
  이성에 올바르게 다가가기 위해서 줄리언 바지니는 이성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신화를 크게 4가지로 구분하여 그러한 신화가 잘못되었음을 주장한다. 우선 1부 <심판자(The Judge)로서의 이성>에서는 이성이 전적으로 객관적이어서 어떠한 주관적 판단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신화를 비판한다. 특히 종교와 과학 분야에서의 이성 사용법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제껏 종교는 그 맹목적 믿음으로 인해 논쟁이 불가능한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반면 과학은 객관적인 답을 제시하는 이성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바지니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깨부순다. 종교의 경우, 특정 종교의 기본적 신념이 얼마나 정당하지를 묻기 위해 이성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과학자들의 두뇌가 아무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해도 실제로는 과학자들이 직감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과학이 특정 개인과 무관하게 객관적이라는 주장의 권위를 약화시킨다.
  다음으로 2부 <삶의 지표(The guide)로서 이성>에서는 이성이 우리에게 최고의 지표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신화를 비판한다. 여기서는 특히 철학에서 이성이 각종 오해를 받아왔음을 언급한다. 피터 밴 인와겐(Peter van Inwagen, 1942-)이 “철학에서 의견 차이는 만연하고 결코 해소될 수 없다.”고 말했듯이 철학의 대부분 영역에서 의견 일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철학이 순수하게 객관적인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저자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홀대받아 온 철학자들의 자서전에 집중한다. 『고백록』에서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자기 삶에서 일어난 일들을 자신이 지적 발전의 원인으로 자주 규정한다. 이는 성격과 사유, 특히 유년 시절에 형성되는 성격적 측면들의 관련성이기도 하다.
  3부 <선행의 동기(The Motivator)로서의 이성>에서는 우리가 제대로 행위하도록 이성이 동기부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세 번째 신화라고 비판한다. 3부의 결론은 사심 없는 합리적 이유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성은 객관적이어야 하고 사심이 없어야 하는 것으로 상정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 예로 당신이 나를 도와야 할 ‘나에게 필요한’ 이유가 있다는 데서 당신이 나를 도와야 할 ‘당신에게 필요한’ 이유가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는 내가 당신을 도와야 할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마지막 4부 <정치적 이상(The King)으로서의 이성>에서는 우리가 완벽하게 이성적인 원칙 위에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신화를 비판한다. 바지니는 더 이상적인 국가를 주창하기 전에 그것이 실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고려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현재 유일하게 온당하고 지지받을 수 있는 정치제도는 심의하는 이성을 중심에 두는 ‘다원적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책의 결말부에서는 특별히 52가지의 “이성 사용 가이드”를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하지만 이성을 사용하는 실질적인 기법을 제공한다기보다는 이 책의 주요 주장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이성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를 조성하고자 하는 쪽이다. 본문의 내용이 조금 어렵게 다가오는 독자라면 이 가이드와 해당 본문의 내용을 함께 읽기를 권한다.
  줄리언 바지니가 강조하는 것처럼 오늘날 이성은 매우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있다. 위기에 빠진 이성을 더 극한으로 몰아가는 것은 매우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제껏 이성을 완전무결한 존재라 넘겨짚고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 그리고 저자가 걱정하는 이 같은 이성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분야를 막론하고 감정이 아닌 이성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오늘날. 오래 묵은 오해를 푸는 일은 어렵고 막중하지만,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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