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발란스

 

  올 초엔 무엇을 하고 싶다거나 먹고 싶은 게 없었다.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도... 태어난 이래 야망이나 원대함은 없었대도 그날그날 하고 싶은 건 있었다. 온도 습도 적당한 날 진잠도서관까지 슬리퍼 신고 걸어가서 신간 잡지랑 책을 읽어야지- 광어 지느러미에 청하를 먹어야지- 라거나 누구랑 손잡고싶다거나 하는 욕구 정도는 있었다. 끝내 달성했을 때의 만족감, 살아있음을 느낀다. 내가 이걸 하려고 여태 살아있는 거구나! 그것으로 하루를 살고 일주일을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환경이 변한 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된 것이 이상했다. 돈이 없어서 그런가? 살쪄서 그런가? 원래도 그랬다.
  불감의 시기엔 좋은 글을 읽어도 아 좋네, 하고 말았고 싫은 것엔 그나마 민감하게 반응했으나 즉각적인 분노나 증오감 표현으로 끝났다. (깜빡이 없이 들어오는 운전자에게 ‘아- x발!’ 같은 욕을 하는 정도) 전에는 그 상황이 벌어진 이유나 대안까지 생각했었는데.
  그 상태로도 살아지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행복하게 살 수는 없었다.
  상태가 나아진 것은 세 달의 여행이 끝난 뒤였다. 다른 문화에서 다른 언어를 쓰며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던 구십일이 지난 뒤, 나는 어쩐지 조율이 된 것 같았다. “역시 탈조선하니 살맛 나더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뭐 그것도 있겠지만 말하자면 그 삼 개월은 해상도 조정의 시간이었다.
  의욕이 없다는 현상은 균형이 깨졌다는 원인으로부터 생긴 것이었다. 나라는 인간이 균형을 맞추려면 충분한 휴식, 그동안에 일어나는 과거에 대한 성찰, 그것에 기반해 앞으로를 상상하는 일이 필요했다.
  그 시간은 돈으로 확보된다. 삼 개월의 여행 동안 나는 사백만 원을 썼다. 쓸 수 있었다. 여행을 끝낸 나는 지금, 말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모두에게 기본소득을’을 이야기한다. 모든 이들에겐 비빌 언덕이 필요하다. 모든 이들에겐 삶을 띄어 쓸 시간이, 돈이 필요하다. 아-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도로에서 좀 덜 빵빵거리고 실수하는 사람한테 덜 욕하고 서로 덜 증오할 것 아닌가.
  불감을 주제로 겨우 행복 따위의 이야기를 하니까 시시하지만, 이 시대에 행복을 말하는 게 순진해 보인다는 거 알지만... 진심이다. 불감의 대항마는 진심일 수도 있다.

BOSHU 편집장 서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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