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때는 바야흐로 거친 뜨거움이 사람들의 몸을 뒤 덮고 마음마저 들끓게 만들던 7월의 어느날, 다리를 접질린 나는 홍대 한 가운데에서 수많은 인파를 피해 다리를 쩔뚝이며 병원을 찾아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일은 토요일, 그 어느 정형 외과도 열지 않았었다. 결국 응급실에 가라는 부모님의 조언에 따라 버스에 몸을 맡기려던 그 때, 심상치 않은 시선이 나를 휘감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눈초리에 당황한 나는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단정하게 차려입고 품 속에 설문지와 A4 파일을 가득 든 두 청년이 나를 주의 깊게 응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나에게 다가와 심리 테스트에 참여해 줄 수 없냐고 물었다. 나는 그들이 번화가에 자주 출몰하는 종교단체 인물들이 아니었을까 의심하였지만 버스가 오려면 10분 가량 남아 있었고 심리 테스트를 한다는 말에 일단 그들의 요구에 응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출신, 선호 색깔, 취향, 성향 등에 대해 물었고 나는 그 질문에 모두 성실히 응했다. 그들은 이러한 나의 답변을 가지고 나의 성격, 생애 등에 대해 유추하였고 그들이 말한 나에 대한 추측은 놀랍도록 정확했다. 나는 그들의 통찰력에 감탄하여 그 원리를 물었고 그들은 이 모든 것이 자신들이 속해 있는 기관에서 만들어 낸 검사법이라고 말하였다. 그 후 그들은 나에게 실내에 들어가 좀 더 자세한 애기를 나눌 수 없냐는 요청을 하였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신종수법이구나”
  그들이 ‘도를 아십니까?’와 같은 종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얼른 버스를 타고 그 자리를 벗어나고자 했으나 이미 그들과의 대화에 심취해 버스를 놓치고 다음 버스까지는 15분가량이 남은 뒤였다. 걸어서라도 도망치려 했으나 다리를 다친 터라 그들의 끈적한 추격을 벗어날 순 없었다. 그들은 나의 뒤를 따라오며, 때때로 나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나를 붙잡으려 했다. 그렇게 그들과 100미터가량 함께 걸은 후 이들을 뿌리칠 수 없음 을 깨달은 나는 결국 택시를 타고 세브란스 병원까지, 버스 타고 1200원이면 갈 거리를,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를 3500원이라는 거금을 내고 가버리게 되었다. 우리 모친께서는 구청 옆에서 약국을 오랜 기간 운영하셨다. 내가 유치원 다닐 때도 약국을 하셨으니 거의 20년 동안 운영하고 계신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약국에 있을 때가 많았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위해 낮잠 을 자라고 잘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국에서 낮잠을 거의 자지 못하였다. 그것은 구청 앞에서 항상 데모를 하는 한 아주머니 때문이었다. 아주머니께서는 대략 10시 쯤 확성기를 10개 가량 장착한 개조차량을 가지고 나와 저녁 여섯시까지 노래를 틀고 소리를 지르시며 데모를 하셨다. 어렸을 때라 확실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재개발로 인해 살던 곳에서 나왔는데 보상금에 대해 불만이 크셨던 모양이다. 그 자리에서 데모를 한지 1년이 지난 무렵, 나는 차에서 나오는 노래와 아주머니 데모 멘트를 전부 외워 학교에서 소리를 지르고 다녔다. 어느 날 한 식당에 식사를 하러간 어머니와 나는 그 아주머니께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평소 아주머니를 딱하게 여기시던 어머니께서는 아주머니께 식사를 대접하시며 어찌하여 그렇게 오랜시간 데모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들어보니 그 아주머니는 자식이 전부 연락이 끊기고 남편 또한 전과가 많아 취업이 힘들어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에는 경범죄를 저질러 일부러 감옥에 가있는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모르던 나는 이러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반년이 지났을 때 경찰이 와 아주머니와 실랑이를 벌였고 차도 견인 당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그 아주머니와 확성기차량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안지수(산람자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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