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바람벽이 있어

  굽이굽이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백화점 지하에서 구매한 흰 아이싱이 올려진 레드벨벳케이크를 정확하게 반으로 가르면서 나는 물었지. “그래서, 사랑하는 이야. 너는 조금 더 자라면 무엇을 하고 싶어?"너는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조금 털어내고는. 아이싱보다 더 하얗고 달콤하게 웃으면서 내 질문에 답했다. 지금은 하나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그때의 내게는 정말로 높고 난해한 너의 꿈들은 경청하기 위해 잠시 포크를 멈추었던 나를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절망이 쏟아지는 얼굴을 나는 너에게 들키지 않으려 남은 컵케이크를 먹을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답게 퍽이나 상냥한 사람이었기에. 내가 어디가 아픈 게 아닌지 걱정을 하다가 우리는 헤어졌다.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가는 동안, 길을 밝히던 가로등은 죄다 노란 빛으로 빛나기에 나는 깨진 불빛에 쫓기듯이 내내 서둘러 걸었다. 네가 원하던 일을 하나하나 이루는 동안 내내 한 자리에 머무르고만 있던 내가 너무 한심해서. 나는 내 무기력함이 가장 그럴 듯해 보이는 내 방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고등학교 재학시절, 너를 별을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환하게 웃을 때마다 나오는 가지런한 흰 이. 하얀 손. 누군가에게나 다정하고 따뜻한 문장들. 빠르게 반짝이며 사라지는 그 무언가가 아니라, 언제나 그 하늘 한 쪽을 오롯이 짊어지고 서서. 지상에 있는 그 수많은 것들을 오래오래 사랑하는 별. 나는 그런 너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서. 너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내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나갔지. 우리는 고등학교 2년을 같이 걸어다녔다. 해질녘 그림자를 등 뒤에 두고. 운동장을 빙빙 돌면서 어제 읽은 백석 시를 이야기 했다. 야간자율학습 중간중간 서로에게 편지를 쓰면서 오늘 힘든 일을, 내일 우리가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가면서 히히거리며 웃었다. 작은 하루하루가 빛이 났던 나날들. 네가 있어 빛났던 나의 어린 날. 희고 예쁜 별. 내 사랑하는 이야.
  그런 네가 어제는 엉엉 운 날이었다고 했다. 봄바람이 아직 차가워서, 그게 서러워서 울었을 수도 있고, 네가 끝끝내 사랑하고자 했던 그 모든 일들이 창백한 외면으로 다가와서, 삶이 너무 절망스러워서 울었고, 내내 침묵에 지쳐 나에게 연락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나는 그저 눈을 감고 네가 아픈 날들이 그냥 우리가 스쳐지나가는 20대의 멍청한 열병이기를, 너무 아프지 않게 지나쳐가기만을 빌었다. 그 아무것도 아닌 날들이 세상을 도배하고 있고. 나는 점점 무미건조해지고, 표정을 잃어가는 것이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나는 내가 좀 더 너에게 잘 어울리는 사람으로 살려면 고통과 회색의 무언가는 외면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어둡고 초라한 오늘은 무슨 변덕이 들었는지. 책상 두 번째 서랍을 뒤적여 직사각형으로 접힌 네가 준 편지를 손에 들었다. 그 때 우리가 수학문제를 풀기위해서 사다놓았던 종이 위에 네가 적은 백석의 시.
  네가 과거에 건넨 종이를 붙잡고 새벽이 오는 내내 읽었다. 너의 손에서 태어난 글자를 쓸어보면서, 우리는 누군가의 가장 귀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아닐까. 그래서 때때로 쓸쓸하고 넘치는 슬픔 속에 살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내일을 꿈 꾸는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뒤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6월의 마지막 주를 마주하고 있었다. 너는 내일 나에게 괜찮다고 전화를 걸겠지. 그리고 아마 다시 씩씩하게 걸어가겠지. 누군가의 북극성답게. 누군가의 흰 별답게. 올 한 해도 힌 바람벽에 나는 기대어 누군가를 사랑하는 세상을 보겠구나. 의자에 앉아 멍하니 생각을 했다.


모민영 학우 / 독어독문학과

저작권자 © 충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