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피부, 하얀 가면

  현지시간으로 2017년 2월 26일,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다. 이번 시상식에 노미네이트된 작품 가운데, 두 편의 작품은 필자의 이목을 끌었다. 작품상을 비롯해 총 세 개의 상을 수상한 '문라이트'와 수상의 영광을 누리진 못했지만 여러 부문에서 쟁쟁한 후보로 이름을 올린 '히든 피겨스'가 바로 그것이다. 전혀 다른 분위기로, 전혀 다른 내용을 그리고 있는 두 편의 영화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다. 동성애자의 성장기를 그리고 있는 '문라이트'와 여성들의 도전을 그리고 있는 두 영화는 작품의 주인공을 흑인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그들은 성정체성과 성별이라는 문제로 난관에 이르기에 앞서 백인과 흑인으로 구분된 인종간의 차별과 마주한다. 

 본 글은 이 두 편의 영화에 침잠해있는 흑인과 백인의 인종차별 문제에 관해 깊이 있는 성찰을 보이는 프란츠 파농의 저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소개하고자 한다.
 
 책의 제목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자신들의 얼굴을 표백시키는 가면을 착용하던 흑인들에 대해, 저자는 고향인 마르티니크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그의 저서를 읽다보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가령, 우아하고 점잖은 외국인과 야만스럽고 폭력적인 외국인을 떠올렸을 때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백인과 흑인으로 이분화 되어 있지는 않은가? 왜 우리는 천사를 백인으로만 생각할까? 등이 그러하다. 프란츠 파농은 자신을 비롯한 흑인들의 사고에도 이미 하나의 습관처럼 흑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자리 잡아있음을 설명한다.

 마르티니크의 사람들은 프랑스 백인들이 구사하는 불어를 그럴듯하게 구사하는 사람에 대해 ‘백인처럼 말하는’ 흑인이라고 칭찬하고 그들보다 덜 ‘백인화’된 다른 지역의 흑인들이 마르티니크의 흑인처럼 행세하는 것에 분개한다. 아이들은 흑인 천사를 거부하고, 성인들은 백인 배우자를 희망한다. 그들 스스로에게 있어 흑인은 (자신이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야만스럽고 더러운 존재이며, 그들은 지속적으로 백인을 선망하고 그들의 세계에 편입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한편 백인들 역시 흑인들을 대함에 있어 그들 자신과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같은 백인을 대할 때에 정중한 언어를 사용하다가도 흑인과 대화할 때면 그들은 마치 어린 아이를 대하듯이 말을 한다. 혹은 흑인들이 그들에게 정중한 표준어로 길을 물어도 그들은 속어로써 대답한다. 그들은 흑인들을 ‘검둥이’라는 비칭으로 부르며 그들을 사악하고 야만적인, 공포의 존재로서 취급한다. 그리고 프란츠 파농은 이와 같은 백인의 행동이 무의식적으로, 문제의식 없이 이루어진다는 부분에서 분노한다.

  현대 사회에서 유색인과 백인을 상하로 구분 짓는 계급은 없어졌으나 실재한다. 그들 사이에 ‘차이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백인의 유색인에 대한 무관심이나 온정주의 호기심 외의 형태로는 형상화 되지 않는다. 하지만 프란츠 파농은 주장한다. 자신은 더 이상 노예제도의 노예가 아니며, 노예였다는 과거를 통한 유색인들의 불행과 한때 인간을 살육했던 과거를 통한 백인들의 불행의 역사로부터 벗어나야만 나 자신의 자유를 위한 순환을 시작할 수 있다고.

신다슬 대학원생 기자 (국어국문‧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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