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이형권 교수(국어국문학과)

  지난 주말을 이용하여 일본의 홋카이도에 다녀왔다. 여행 기간이 짧아서 많은 곳을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한겨울과 새로운 봄 사이에 걸쳐 있는 홋카이도의 풍광이 인상 깊었다. 잔설이라고 하기는 많은 양의 눈들이 들판과 산등성이마다 쌓여 있었다. 길가에 남아 있는 눈들은 자동차의 열기 때문인지 질척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한낮에는 햇살과 바람도 제법 따뜻하여 봄이 멀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멀리 남쪽의 오키나와로부터 봄기운이 서서히 올라오는 듯했다.  
  홋카이도는 일본에서 근대화가 가장 늦게 이루어진 지역이라고 한다. 메이지 유신 시절까지도 원시 자연과 토속적인 삶이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한다. 홋카이도가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 즈음이었는데, 그 시절 개발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미국의 농업 전문가 클라크(W.S. Clark 1826~1886)라고 한다. 그는 1877년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농림학교 교장으로서 1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떠나면서 일번의 학생들에게 유명한 말을 남겼다. “Boys be ambitious!”
  “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클라크는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 콤플렉스에 빠져있는 일본의 청년들에게 이 말을 전하면서 인생에 대한 열정과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클라크는 홋카이도 대학 학생들에게 농업 기술자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나는 홋카이도를 여행하는 클라크의 이 말을 계속 마음에 품고 다녔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우리 학교 청년들에게 이 말을 다시 강조해 주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의 배후에는 우리 학생들이 다른 나라의 명문 대학 학생들에 비해 야망이 부족하지 않나 하는 걱정이 자리 잡고 있다.  
  야망이 없는 청년은 진정한 청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야망은 비루하고 조악한 현실을 뛰어 넘어서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정신의 디딤돌이다. 현실에 안주하거나 현실에 매몰되는 청년은 더 이상 청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조금은 무모해 보여도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려는 정신이 있어야 진짜 청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청년 정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에 순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에 과감하게 저항하고 도전하는 것이다. 모범생보다는 반항아가 청년다운 모습니다. 청년은 비루한 인생, 부정한 현실에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 
  철학자 니체는 「디오니소스 찬가」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착실하기만 하다면, 그것은 인생이 아니다/ 언제나 돌다리를 두드리고 걷는, 그것은 딱딱하고 편하지 않다/ 바람에게 말했지, 나를 치켜 올려 달라고/ 나는 새들과 어울려 나는 것을 배웠지/ 남녘을 향해, 바다를 건너 나는 비상하였다.” 이 시구에서 “착실”하다는 것은 주어진 인생에 순응하는 태도이다. “돌다리를 두드리”듯이 언제나 안전한 인생만을 지향하는 사람은 야망이 없다. 청년은 비록 세상의 거친 “바람”에 시달려도 그것을 반작용 삼아 “새들”처럼 “비상”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새 생명들이 기지개를 켜는 3월이다. 캠퍼스에는 봄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다. 지난 겨울의 앙상한 꽃나무들이 꽃을 향한 야망이 없었다면 이토록 멋진 모습을 연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꽃나무들은 꽃을 향한 야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꽃피울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따뜻한 봄날에 CNU의 청년들에게 나는 다시, “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라고 외치고 싶다. 봄꽃을 닮은 그대들이 먼 훗날 아름다운 인생의 꽃으로 활짝 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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