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 글을 읽으면 당신은 동성애자가 될...까요?

  팔꿈치에서 빛이 났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좋아하게 된 학원 여자애는. 신기하다, 하면서 수업시간 내내 그 애를 보고 있으면 시작하자마자 종이 쳤다. 수업은 일주일에 두 번. 종강일에 가까워올 수록 욕심이 생겼다. 회색 치마에 회색 자켓인 저 학교가 어딘지 알고 싶다. 학원이 끝나면 뭘하는지 알고 싶다. 내 존재를 알려주고 싶다. 문과 수학은 포기만 안해도 3등급은 맞는다고, 충대는 간다고, 선생님이 얘기하는데 나는 그 애만 보였고 그 애만 들렸다.
  수업이 끝나기 전에 미리 짐을 챙겨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 애를 기다렸다. 집에 가기 전에 얼굴을 보고 싶어서. 숨을 쉬었더니 복숭아 향기가 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문자를 보내면 수신인 칸에 번호가 없어도 그 애한테 도착하면 좋겠다고.
  다음 날, 음악실에서 핸드폰을 켰는데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와 있었다. 누구세요, 였던가 뭐해, 였던가 아무튼 모르는 번호라는 게 중요했다. 백 번 천 번 상상했더니 정말 그 애한테 문자가 온 건가. 내 이름을 밝히고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니 내가 눈꺼풀에 몇 달 째 달고 다니던 그 이름이 화면에 떴다.
  지금까지 나는 남자와 여자가 주인공인 로맨스물을 보면서 커왔는데, 볼 때 마다 감정 이입이 안 된다. 설레지도 않고, 마음 아프지도 않다.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니까. 저 문자를 받은 순간은 첫 연애의 시작이기도 했지만, 레퍼런스 없이 하는 최초의 사랑이기도 했다. 정말 사람들은 누군가와 연애를 할 때 이 정도로 기쁜건가? 다들 이러면서 살았던 거야?
  이후 네 명의 여자와 연애했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랑했다. 싸우게 되는 지점, 화를 푸는 과정,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들이 달랐다. 전 애인과의 경험을 토대로 지금 애인과의 관계를 꾸려갔다. 참조할만한 외부의 텍스트는 없었다. 텔레비전 드라마 속의 인물들이 비벼지고 섞이는 과정은 대부분 이성애자 인물을 전제하고, 이성애자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동성애자가 사는 모습이 필요했다. 설레거나 울거나 배우기 위해서.
  <인생은 아름다워> 드라마가 방영되고 나서 “방송 보고 우리 아들 게이 되면 책임질거냐”는 항의가 있었다. 이성애 콘텐츠를 20여년 간 보고 자란 내가 이성애자로 변하지 않은 걸 보고 안심하라고 말하고 싶은데. 어쨌거나 동성애자는 동성애자가 ‘되기’ 위해 동성애자가 등장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창피해>,<가장 따뜻한 색, 블루>,<캐롤>,<아가씨>.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이다. <캐롤> 속 테레즈와 캐롤이 서로를 발견하는 장면에서 나는 ‘진실한 사랑의 맛을 본 것이 분명’한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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