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알 수 없음"

  

  '따르르르릉(자전거 소리 아님)' 첫 취재를 하던 중 취재 사항 관련 문의가 있어 학교 본부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관련 사항은 행정 절차와 회계 내용이 얽혀있어 공개된 자료만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람의 ‘설명’이 고팠달까. 직접 찾아가는 방식이 최선이지만 단순 설명이 필요했기에 전화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나름 업무 담당자를 위한 배려도 섞였던 것 같다. 8분가량 이어진 통화에서 담당자는 “자료에 다 나와 있으니 공부를 좀 해서 질문하라”고 훈계했다. 기자는 통화 내내 “죄송하다”고 사과했고, 그렇게 곧이곧대로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기자는 불행히도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다. 특히 난생 처음 마주한 지식과 정보에 대해서는 덜컥 두려움의 감정을 갖기도 한다. 그렇기에 담당 업무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담당자에게 기자의 느려터진 질문은 공무를 방해했을 것으로 보인다. 공부도 덜 된 상태로 물었던 것을 또 묻고 하는 기자가 참으로 답답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역시 기자는 이해력이 빠른 편이 아님이 확실하다. 전화를 끊고 부족한 기자 자신을 반성했지만 그것도 잠시, 달팽이 같은 이해력으로는 훈계를 오롯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먼저, 기자는 공부의 일환으로 전화를 건 것이다. 기자가 취재함에 있어서 먼저 관련 내용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공개된 자료만으로 공부가 충분할 수도 있지만, 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전후 맥락과 행간을 포함한 온전한 공부는 사람의 설명까지 포함돼야 한다. 그럼 가장 잘 설명해줄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관련 업무 담당자이다. 정확한 공부를 위해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했더니 재차 공부하라 다그친다. 그런데 이런 공부는 어디서 해야 하나? 공부의 끝은 없다지만 언제쯤이면 기자는 공부의 시작이라도 어렴풋 알게 될까. 모르는 것이 죄인가? 기자는 그것마저 몰랐다. 달팽이 기자는 지금도 궁시렁 거린다. ‘그렇다 쳐도 알고 싶은 것까지 무시해도 되나.’
  '질문'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사전적 정의는 ‘알고자 하는 바를 얻기 위해 물음’이다. 취재 과정에서의 질문은 더 세분화된다. 정말 몰라서 묻는 공부를 위한 질문과 행간을 읽기 위한 취재의 질문이다. 설사 질문의 목적이 취재든 아니든 간에 담당 업무자에 업무 관련 사항을 전화로 물어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학보사 기자로서 학내 전반에 대한 질문에도 이렇게 반응하면 일반 학우의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할까?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알고 질문하라니. 질문 자체를 위축시키는 분위기는 공부를 막고, 공부를 막는 순간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다. 질문을 할 때 질문 이외에 많은 것들을 고려해야하는 우리 모습이 조금은 안쓰러웠다.
  에어컨 관련 취재를 준비하며 ‘공부’차원에서 학교 본부 시설과에 전화를 걸었다. 시설과 담당자는 전화로 관련 설명을 하던 중 직접 시설과로 찾아와 이야기하자고 했다. 다음날 시설과를 찾아가니 담당자는 사전에 요구하지 않은 자료까지 미리 인쇄해 제공하며 설명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설명 중 불쑥 튀어나오는 어려운 용어에 대한 질문에도 끝까지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으며, 관련 맥락까지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끝난 뒤에는 “또 모르는 거 있으면 여기로 연락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명함을 주었다. 놀랍게도 “공부하고 질문하라”는 전화와 시설과 담당자와의 ‘공부’는 같은 날 이뤄졌다. 기자를 포함해 학보사 기자 전체, 아니 더 나아가 다수의 학우들이 담당자에 질문을 할 수 있다. 우리의 질문 뒤에는 누가 기다리고 있을까. 누가 기다려야 할까. 그럼에도 기자는 오늘도 전화를 건다. '따르르르릉 주사위는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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