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 홍여진 기자(정치외교학과·09 졸)를 만나다.

<뉴스타파>에서 열정적인 보도를 하고 있는 홍여진 기자. 출처 유튜브 갈무리

Q. 학우들에게 기자라는 직업을 소개하자면?

  올해로 기자 경력 8년차다. 그런데 아직도 기자가 어떤 직업이냐고 물으면 한 마디로 정의되지 않는다. 기자라는 명사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신문사·잡지사·통신사·방송사 등의 언론기관에서 취재·편집·평론을 담당하는 사람’이라고 나온다. 사전의 정의대로 신문사, 잡지사, 통신사, 방송사에서 일하면 다 기자인 것 같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정부가 내년부터 전기세를 인상한다는 발표를 했다. 이걸 전기세를 그냥 인상했다는 정부 발표를 그대로 받아써서 기록하는 사람과 ‘전기세를 왜 인상할까’ ‘전기세 인상하면 피해를 보는 집단은 어디일까’, ‘그 이면에 꼼수는 없던 걸까’ 이 부분까지 ‘취재’해서 기록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바로 이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 ‘기자’인 것 같다.
참고가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기자라는 직업을 꿈꾸면서 마음에 새겼던 기자의 정의가 있다. 안수찬 한겨레 21 편집장이 쓴 『기자, 그 매력적인 이름을 갖다』 라는 책에 나오는 기자에 관한 설명이다.
  “검사가 강철이라면 기자는 수은이다. 부드럽게 빛나며 유연하게 감아 도는데 어느새 상대를 마비시켜 버린다. 그리고 이 수은은 강철로 무장한 공권력까지 자신의 먹잇감으로 삼는다(중략...) 기자가 되려면 선량한 본성 위에 강인한 발톱 하나를 마련해야 한다”
  아직까지 이보다 적절한 비유는 찾지 못했다. 선량한 본성이나 정의감만으로는 엄혹한 사회의 이면을 파헤치는 데 한계가 있을 것 같고, 이를 뚫고 취재할 용기와 집요함이 있는 사람이 기자라는 직업에 적합한 거 같다. 더불어 그 과정에 어떠한 성역도 없어야 한다.

Q. 기자 소개 글에 ‘내 일이든 남 일이든 부당한 거, 억울한 거 절대 못 참아 기자가 되었다’라는 말이 인상에 남는다. 구체적으로 무슨 이유로 기자가 되었는가?

  정말 없어 보이는 답변이지만, 처음에는 겉멋에 반해서 기자라는 직업을 꿈꿨다. 중학교 때 방송반 아나운서를 했었는데, 기자들이 취재해서 원고를 써주면 나는 읽기만 했다. 그때 그 원고를 써주는 기자가 너무 멋있었다. 그때부터 막연하게 기자를 꿈꿨다.
  그런데 이 직업에 대해 알아볼수록 나랑 잘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있는 거 싫어하고, 주변에서 부당한 일이 생기는 걸 보면 쉽게 분노하는 성격이 제격인 것 같았다. 사회 부조리에 나 혼자 흥분하고 분노하면 오지랖으로 비춰질지 모르지만, 이런 성격으로 기자가 되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막연한 생각에 쐐기를 박은 건 대학교 2학년,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부터였다. 하루는 학원 원장이 따로 불러서 기자한다고 끙끙 대지 말고 학원 강사를 해보라고 제안했는데, 이런 말을 하더라. “기자가 돼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했지. 세상은 바뀌지 않아,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세상에 빨리 속하는 법을 배워” 그 말을 듣고 더 강하게 마음먹었던 거 같다. 반드시 세상을 바꾸는 기자가 돼서 당신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겠다고.

Q. 대학시절 어떠한 학생이었고, 어떠한 면이 현재 모습에 자양분이 되었는가? 또 대학시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대학시절엔 정말 잠이 많은 지각쟁이였다. 이건 지금도 그렇지만….
  집이 청주였는데, 시외버스로 학교까지  40분 정도 걸렸다. 그 거리를 오가기 힘들어서 궁동에서 자취를 했다. 자취를 하고서도 사회과학대학까지 올라가기 귀찮아서 택시를 타고 다닌 한심한 학생이었다.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동기나 선배들 사이에서 사회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면 목소리 높여 주장을 펼치던 학생이었다.
  한번은 조별 과제 발표가 있었다. 우리 과가 정치외교학과이다 보니 정치적인 견해를 드러내야 하는 과제들이 있다. 나는 담당교수와 반대의 견해를 갖고 있었고, 내 뜻대로 리포트를 쓰면 조 전체거 피해를 입는 상황이었다. 당시 교수님 성향에만 맞추면 A+를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나 있어서 웬만하면 그에 맞춰 써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잘 안 되더라. 결국 내 견해대로 리포트를 썼고, 점수는 예상대로 좋지 않았다. 우리 조는 내가 얼마나 싫었을까…

Q. 기자라는 직업을 준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기자를 준비하면서 어떤 일들을 했나?

  스터디는 체질에 안맞아서 오래하지 않았고, 바깥에서 나름의 사교육(?)을 받았다. 평소 관심 있게 보던 오마이뉴스 <기자만들기 교실>,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운영하는 <언론학교> 등에 참여했다. 특히 언론학교에선 현재 성공회대 노동대학장을 맡고 있는 하종강 교수님 등이 연사로 강연했었다.
  당시 하종강 선생님이 강연에서 “너무 좌편향된 거 아니냐”는 청중의 질문에 이런 대답을 하셨다. “부채를 들고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데, 몸이 너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러면 어느 쪽에 부채를 들어야겠느냐. 나는 균형을 맞추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때 무릎을 탁 치고 깨달았다. 그냥 기자 말고, 기득권층에게 기울어진 사회의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약자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그런 기자가 되자고.

Q. 기자님의 기사를 보면서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취재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취재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현장과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정말 많은 현장이 기억나지만, 그래도 하나만 꼽으라면 진도 팽목항이다. 2014년 4월 24일 경 취재를 갔다. 한시라도 빨리 구조해야 하는데, 내가 갔던 3일 내내 비가 왔다. 부모님들은 시신이라도 빨리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 제대로 씻지도, 자지도, 쉬지도 못하고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에서 밤을 지샜다. 그러다 시신 수습 소식이 들릴 때면 우중에 담요 한 장 들고 뛰쳐나가 “저 아이가 우리 아이가 맞는 거 같다”고 서로 주장하며 우는데, 옆에서 같이 우는 일 밖에 하지 못했다. 나름 취재에 자신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는 정말 뭘 어떻게 어디서부터 취재해야할지 모르겠더라.
  그때 취재한 기사가 ‘자전거 바퀴에 바람 넣는 걸로 세월호 바람 넣은 꼴’ 이라는 기사다. 정부가 에어포켓에 생존해 있을 생존자에게 공기를 주입했고, 그것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던 것을 확인하는 기사였다. 그런데 공기주입기는 매탄가스와 같은 공기를 주입하는 공업용 기계였고, 공기주입도 사실상 실패했다. 취재하면서도 참 좌절스러웠고 보도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아, 내가 이런 나라에 살고 있다니. 이런 소식을 또 다시 유가족에게 들려드려야 하다니…’ 하지만 진상규명을 위해선 작은 팩트 하나라도 다 기록해야한다는 마음으로 보도는 했다. 진도 팽목항은 아마 앞으로도 오랜 기간 기억에 남는 현장이 될 것 같다.

Q. 기자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힘든 일을 겪었던 일화가 있는가?

  기자생활은 하면 할수록 어렵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 취재해야할 필수적인 정보가 있는데, 그런 정보 일수록 취재원이 공개를 꺼린다. 그런 정보를 캐내서 발굴하는게 소위 특종인데, 참 욕심나지만 어려운 일이다.
  힘든 일은 아직까지 크게 없다. 뉴스타파에 일하다보면 정치인에게 난감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재벌기업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주변에서 해코지 당하는 건 없냐고 걱정하시는데 아직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다만 마음이 힘든 일은 요새 많이 겪고 있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 등등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은 점점 늘어나는데, 역량이 그에 미치지 못해서 큰 도움을 못 드릴 때, 마음의 짐이 계속 불어나는 느낌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 30대 젊은 가장의 억울한 죽음들을 많이 취재했는데, 취재 이후에도 유가족의 느꼈던 억울함과 슬픔의 감정에서 나도 잘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점점 그 가족의 일이 나의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동일시의 감정이 들면서, 몸보다는 마음이 힘든 요즘이다.
 
Q. 언론인으로서 가장 보람찼던 순간이 있다면?

  기자들은 아무래도 새로운 팩트에 집착한다. 나 역시 세상에 보도되지 않은 새로운 내용을 내가 처음 발굴해서 보도했을 때 뿌듯하다. 
  '진심으로 진실을' 트위터 소개란에 써놓은 문구다. 이전 직장에서 뉴스타파로 이직하면서의 나름의 다짐을 정리해 본 거다. 정말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정말 머리와 마음이 ‘진심’을 다해 취재를 했을 때, ‘진실’에 가까운 결과를 얻는 거 같다. 그런 마음으로 보도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진심을 독자나 시청자, 취재원이 “기사 잘봤어요” 라는 문자 한통으로 알아주실 때 취재하면서 느꼈던 피곤함이 싹 달아난다.

Q. 미래에 기자를 꿈꾸고 있는 학우들이나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는 학우들에게 할 말이 있다면?

  어떻게 기자가 될 것인가 말고, 어떤 기자가 될 것인가를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내가 어떤 기자가 될 지부터 고민해보고 그 방향에 맞는 곳에 도전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또한 대학생 때부터 최대한 많은 현장을 가보고, 그 현장에 대한 생각을 기록으로 남겨 볼 것도 당부한다. 기자가 되겠다면서 일주일 내내 스터디만 하는 학생도 있던데, 요즘 같은 때는 백남기 농민 빈소도 찾아가보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도 찾아가보길 바란다. 취업준비로 바쁘겠지만, 기자를 꿈꾼다면 그런 현장에 많이 가보는 것도 일종의 취업준비가 될 수 있다.

Q. 앞으로 자신이 이루고자하는 계획이나 목표는 무엇인가?

  언제까지 기자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기자라는 이름으로 사는 동안 기사로 세상을 바꾸는 일을 꼭 해보고 싶다. 앞서 언급했던 학원 원장님이 절대 안 될 거라고 했던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지금까지는 부조리를 찾고, 취재하고, 고발하는 데 그쳤다면, 그 고발이 영향을 미쳐서 사회가 진짜 좋은 방향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고 싶다. 물론 나 같은 기자 한 명으로 세상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바꾸겠다는 마음으로 취재하면, 다음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일에 일말의 기여는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기사를 써서 학원 원장님에게 보란 듯이 찾아가야하는데…. 아직은 이루지 못 했다. 앞으로 사회에 지각변동까지는 아니어도, 권력자에겐 두려움이 되고 약자에겐 희망이 되는 기사 꾸준히 지치지 않고 써나가도록 하겠다. 많이 지켜봐주시면 고마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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