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조별 과제가 이렇게 끝날리 없어!

< 3 >
  자고 싶다 ㅅㅂ..
만 하루째, 얘기 없는 채팅창에 그런 말을 슬쩍 써 보고 지웠다. 커서가 지루하게 깜빡거렸다. 그만해. 레포트 때문에 한숨도 못 잔 사람 졸리게 하지 말라고. 손목에서는 부산스럽게 초침 소리가 울렸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오후 10:30. 뻑뻑한 눈을 잠깐 감을 때마다 Wi-Fi가 꺼졌다, 켜졌다.
혹시 몰라 열어놓고 있는 Gmail에도 새 메일은 없었다. 이렇게 오래 걸리나. 자료를 모아서 보내기에 사흘 정도면 충분한 시간 아닌가. 논문을 찾는 것도 아니고, 프랑스 어떤 지방에서 어떤 와인이 나느냐를 찾는 건데……. 이럴 거면 나도 미리 찾아놨어야 했나.
결국 손 놓고 멍 때리는 건 시간 낭비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자료를 집어넣기라도 쉽게, 구해 놓은 템플릿을 바꾸는 작업을 시작. 제목은 프랑스 지방의 와인. 적당히 나눠 놓은 슬라이드에 프랑스 와인의 생산지의 이름을 적었다. 보르도, 부르고뉴, 샹파뉴, 론, 등등. 보르도 지방을 세세히 나누고 있을 때 띠로링, 하고 카톡 알람이 울렸다. 개인톡으로 보내다니.
늦게 드려서 죄송해요ㅠㅠㅠㅠㅠㅠ
받은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한숨을 한 번 쉬고 ‘정리.zip’ 파일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지방 수가 부족하네. 10시 43분. 추가로 조사해서 집어넣기는 어려웠다. 당장 내일이 발표인데. 나는 애정을 담아 카톡 친구 명을 응시했다.

냥년.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 건 이틀 전 고양이 카페에서 일이 난 후부터였다. 고양이들의 공세를 견디지 못한 그녀가 실수로 노트북을 밟아버린 게 단초였다. 노트북에는 조별과제를 위해 모아 놓은 자료들이 있었다. 하드디스크가 파손되지만 않았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하필이면 그걸 정확하게 밟아 부쉈다. 고양이들이 유독 잘 따르는 사람이라는 건 천성이 착하다는 뜻이겠지만, 모든 일은 과유불급. 죄송해요, 라는 그녀의 절망적인 표정에 동정이 갔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조장은 그런 그녀를 위로해 주고서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죠?
빠르게 정리해서 보내 주시면, PPT 작성하는 거는 어렵지 않으니까요, 혹시 백업해 둔 자료가 있으면 보내주세요.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굳은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다른 사람들은 말을 보태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 사람은 서운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과제가 몰린 탓에 일주일 내내 3시간 밖에 못 잔 내게 남 신경 쓸 여유는 없었으니까.
그녀의 잘못이었으니 그녀가 해결하는 방향으로 대화는 넘어갔다. 가능한 한 빨리 집 주변 PC방에서 누락된 자료를 모아 보내주는 쪽으로 결론. 같은 자료조사 파트였던 조장은 자기 자료를 그녀에게 다시 보내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이 상황에서 딱히 큰 문제가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자료가 없어지긴 했어도, 금방 찾아 다시 모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었다. 오산이었다.
왜 자료를 늦게 보냈는지, PDF 어쩌고 하는 설명인지 변명인지를 그녀에게 들었지만, 나는 일단 납득가지 않았다. 상황이 바늘처럼 뒷머리를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에 붙잡혀 있을 여유는 없었다. 적어도 12시 전에 PPT를 만들어서 발표하는 신입생 꼬맹이에게 넘겨야 했다. 나는 일단 뒷목을 부여잡고 작업을 계속했다.
현재, 오후 11시 정각. 받은 자료에서 중요한 부분을 간추리고, 필요한 부분만 PPT에 드래그 앤 드롭했다. 미리 나눠 놓은 슬라이드 덕에 빠르게 PPT를 작성할 수 있었다. Ctrl+C, Ctrl+V. 한글이 아니라 텍스트 파일로 보내 줘서 다행인 점도 있네.
깔끔해 보이는 표지까지 만든 후, 죽 훑어본 PPT와 정리된 자료들을 발표자에게 넘겼다. 내 눈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AM 12:03. 끝! 그렇게 생각하고 PPT와 폰트를 USB에 저장, 통합된 zip 파일을 메일과 단톡방에 각각 올렸다.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는 완료된 셈이었다. 나는 폭풍전야처럼 침대에 콩콩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대망의 수업 전. 피곤한 눈으로 자료를 옮기려고 USB를 컴퓨터에 꽂았다. 동시에 USB에 있던 자료들이 소멸했다. 훗. 메일에도 백업했으니 다운로드하면 되지. 인터넷을 켰다. 그러나 인터넷도 먹통. 그래, 항상 불행한 일은 걱정이 없을 때 일어나기 마련이지. 나는 당황하지 않고 조장에게 지금 상황을 말했다. 조장이 바로 관리실로 달렸다.
초조한 시간이 지났다.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관리실 曰. 교양관에 있는 모든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퍼져서 일시적으로 인터넷을 막아 놨어. 한 시간 정도 후에야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을 거야. 헌데 이 수업 교수님은 발표에 깐깐하기로 유명했다. 뭐가 어쨌든 일단 순서를 미루면 감점은 확정이었다.
써야만 하나. 나는 조장에게 해결해 보겠다는 말을 했다.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 앉아 있으라고. 마침 내가 PPT 담당이라 다행이었다. 최대한 사람들의 이목에서 벗어난 자리에서 나는 집중했다. 인터넷을 끌어 쓰기 위해서.
나는 어디서든 어떤 기기든 Wi-Fi를 연결할 수 있었다. 아이폰을 처음 썼을 때 알게 된 것이었다. 내가 만지자 아이폰은 금방 WI-Fi에 연결되었다. 실험 삼아 다른 기기들도 만져봤는데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3G와 Wi-Fi가 먹통인 휴대폰도 내 손에 들어오기만 하면 인터넷이 연결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뜨는 Wi-Fi 아이콘에 다들 신기해하면서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기묘한 현상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인간 공유기로 작동했다. 당시 어디서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것은 나름의 장점이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고3 수험생에게는 더한 이득이 없었다. 이마에 갑자기 와이파이 표시가 나타나 빛난다는 게 문제였지만.
기기가 크면 클수록 시간이 걸렸다. 집중해.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았다는 아이콘이 Wi-Fi로 연결되었다는 아이콘으로 깜빡거렸다. 빨리. 3, 2, 1. 연결. 얼른 인터넷을 켜고 메일로 들어가서 올려놓은 파일을 받았다. 컴퓨터도 느리고 다운로드 속도도 느리고……. 하지만 수업 시작까지 8분. 아슬아슬하게 설치까지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격앙된 조장의 말소리가 들렸다.
“뭐?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음. 조별과제가, 불안 불안하다.

저작권자 © 충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