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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정류장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건물 몇 개 없는 휑한 도로. 아무도 밟지 않은 것 같은 새 인도가 쫙 깔려있었다. 횡단보도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나라에 온 걸까.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 멀리 육교가 보였다. 달렸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오늘은 지각하면 안 돼. 절대로!
  입학해 처음 맞는 수강신청은 두근두근했다. 선배의 조언에 따라 프랑스 테마 기행을 수강. 처음으로 조별과제를 맡았다. 조원은 넷. 가위바위보에 져서 억지로 총대를 메게 된 조장 누나, 안경을 끼고 순해 보이는 누나와 뭔가 음침해 보이는 형, 그리고 나.
  “발표자 한 명, PPT 한 명, 자료조사 두 명.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조장 누나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나는 번쩍 말했다.
  “제가 발표할게요!”
  내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과목을 조언해 줬던 선배가 조별과 제에서 제일 쉬운 역할은 발표자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발표자는 자료정리와 PPT를 보고 대충 발표하면 된다고. 그런데 악운이 겹쳤다. 자료조사가 밀렸고 PPT 초고가 오늘 자정에나 완성됐다. 결국, 밤중에 발표문을 만드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나는 부랴부랴 집을 나서야 했다. 그리고 막 들어오는 버스에 탔다. 후아. 안심을 하니 눈이 감겼다. 이제 이 버스가 충남대 앞에서 서면, 교양관으로 가면 된다. 교양관 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ㄲ…ㅏ…….
  그렇게 잠깐 졸았다 깼는데, 이상했다. 이상한데. 뭐가 이상한 거지? 나는 잠결에 생각하다가 밖을 쳐다봤다. 어? 항상 지나던 길이 아닌데? 나는 그제야 버스를 잘못 탔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들짝 놀란 탓에 잠도 놀라 펄쩍 뛰며 달아났다. 재빨리 벨을 누르고, 바로 버스에서 내렸다.
  이런 경우, 반대 노선을 타서 원래의 정류장으로 돌아온 후, 타야 할 버스를 타면 된다. 아니면, 지금 이곳에서 목적지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찾아 가든가. 다행히 오늘은 발표 연습도 할 겸 일찍 나왔다. 지금이라도 길을 찾아서 학교에 가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거지. 내가 길치라는 거.
  길치에게는 가 봤던 길도 항상 처음같이 느껴진다. 매일 새롭고 설레는 첫사랑 같은 거지! 젠장. 사랑도 처음만 같아서는 안 된다던 선배의 말처럼 길도 나한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길치를 치료하기 위해 노력했다. 필사적으로 선배를 괴롭혔지. 과에서 인간 내비라고 불리는 선배! 선배님! 길은 어떻게 찾는 것입니까!
  그냥 길을 걷다 보면, 보통 한 번 간 길은 다 알게 되지 않아? 라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배는 말했다.
  “길을 걸을 때 무슨 건물이 있고 거기를 꺾으면 무슨 가게가 있고, 이렇게 가면 되잖아.”
  그 말처럼 해 보기로 했다. 모서리에는 김밥집. 그 가게를 돌아서 앞을 봤다. 미용실. 아, 김밥집 모서리를 돌면 미용실이 있구나! 뒤로 돌았다. 앗, 내 앞에 김밥집이 있는데 이 모서리를 돌면, 중국집이잖아?
  “선배! 김밥집을 돌아서 보이는 건, 미용실로 외워야 하나요, 중국집으로 외워야 하나요?”
  “그건 왔던 길이니까, 하…….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나 괴롭히려고!”
  선배가 목을 졸랐다. 켁켁. 좀 더 확실한 방법을 알려주세요! 라는 말에 선배는 내 스마트폰을 뺏더니 지도를 열어 내 눈앞에 보여줬다.
  “지도 보고 찾아. 지도. 확실하지?”
  “지도 보고 길을 찾으면 그게 길치겠습니까!”
  당당한 내 모습에 선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 지도를 봐. 네가 어디에 있는지 잘 생각하고, 지도에 적혀 있는 건물을 기준으로 찾아가란 말이야. 지도를 머릿속에 띄워.
  “지도를 머릿속에……?”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지도 어플이 머리에 다운로드 된 건가. 눈을 감으니 지도가 보였고, 내 위치를 알려주는 빨간 점이 깜빡거렸다.
  그때를 기점으로, 한 번만 지나쳐도 지도는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처음엔 기억력이 좋아졌나 생각했다. 혹은 숨어있던 천재성이 이제야 빛을 발한다거나. 떠오르기만 하는 거면 내가 지도를 기억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구나, 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상한 건 빨간 점이었다. 나 자신은 몰라도, 내 위치를 정확히 표시하는 빨간 점. 그야말로 요상한 능력이 생겨버린 거였다.
  이 능력을 사용해 난관을 헤쳐 나가면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도로 길을 찾을 수 있으면 그 사람은 길치가 아니지! 이런 능력 쓸데없어. 차라리 내비게이션을 달아 달란 말이야!
  어쨌든 인터넷으로 어떤 버스를 타야 할지 알게 됐고 버스를 탔다. 스마트폰 만세! 내가 움직이자 머릿속 빨간 점도 열심히 뽈뽈대며 움직였다. 착실히 학교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수업시간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때 도착할 수 있을까?
  나는 좋지 않은 생각들을 지웠다. 인터넷이 알려주는 대로 하면 바로 갈 수 있을 거야. 어? 창밖을 보니 분명 내가 집을 나왔을 때 보였던 맑은 하늘이 곧 비가 내릴 것 같은 우중충한 하늘로 변해있었다. 마치 내 미래 같은 걸…….
  예감은 적중.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장대비가 쏟아졌다. 내린 곳은 충남대 서문? 서문은 또 어디야. 나는 따가운 비를 맞으면서 이리저리 헤맸다. 내가 오른쪽으로 가면 빨간 점도 오른쪽으로 뽈뽈뽈, 왼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뽈뽈뽈. 장난치나! 왜 지도는 2D고 세상은 3D인데! 지도랑 현실이 매칭이 안 되잖아. 젠장. 이런 쓰리디 같은……! 수업시간까지 5분. 도대체 내 시간은 어디로 간 거야! 분명 일찍 나왔는데! 비가 계속 정수리를 강타했다. 내 인생, 역시 노답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누나아…….”
  “야, 너 어디야. 5분 남았는데 왜 안 와!”
  “저……. 길을 잃어서요……. 비도 오고……. 지금 열심히 가려고 하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끝말이 자연스럽게 기어들어갔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누나는 어느 정류장에서 내렸냐고 묻고는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비는 쏟아지고 나는 꼴사나운 개처럼 가까운 가게의 처마 밑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건 처음부터 문제였어. 자료조사가 날아갔었던 그때부터. 나는 비를 떨어뜨리는 무심한 하늘을 바라봤다.
  조별 발표 무사히 할 수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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