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의 광주… 사진과 함께 보는 36년 전 민주화운동의 발자취

 

사진1,3,5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 사진 2,4,6 곽효원 기자 kwakhyo1@cnu.ac.kr

 

 “내가 그때 현장에 있었는디, 광주시민 전체가 다 모이고 난리가 난거에요. 5.18 딱 터지고 광주에 시민군들이 자치를 스스로 담당해야 하는 ‘치안 공백’ 상태가 35일 간 있었잖어요. 근디 경찰이고 뭐이고 없어도 광주 시내 금은방, 슈퍼마켓 어디 하나 털린 디가 없어요. 누구 하나 죽어불믄 다 내 새끼들 같어서 아줌니들 달려들어 울어불고. 광주가 바로 그런 도시에요. 사람들이 아주 정이 많어요”
 직접 찾아간 지난 5월 18일의 광주. 직접 만난 택시기사의 말에서 광주 시민들이 5.18 민주화운동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지 알 수 있었다. 분명 당시 민주화운동이 남긴 ‘광주 정신’은 광주를 넘어 우리나라 전체에 필요한 시대 가치였다. 5.18 민주화운동이 우리 현대사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 구체적인 전개과정과 역사 속 그 현장은 현재 어떤 모습인 지 알아본다.

 ‘안개 속 정국’에 신군부 등장, ‘전남대’에서 민주화운동 불씨 번져
 1979년 10월 26일,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연달아 들린 세 번의 총소리에 18년 간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권이 막을 내렸다. 유신 독재의 종식에 우리 국민들은 ‘서울의 봄’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기대는 길게 가지 못했다. 불안한 정국에서 전두환 등이 주도한 신군부세력이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한 것이다. 신군부세력은 민주정치 지도자들을 투옥하는 등 군사독재를 재발시켰다.
 민주화를 기대한 국민들은 이에 대항해 전국적인 저항운동을 시작했다. 1980년 5월 15일, 전국 학생 연대가 서울역에서 대규모 민주항쟁을 벌이자 신군부는 이틀 후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5.18 민주화운동의 진원지는 광주에 소재한 ‘전남대학교’다. 계엄령이 선포된 다음 날인 18일, 계엄군은 전남대를 포함한 전남 광주의 각 대학을 장악하고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했다. 등교 저지에 격분한 전남대생 50여 명은 오전 10시부터 ‘계엄 해제’, ‘휴교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사진 €). 공수부대원들은 시위하는 학생들을 무참히 유혈 진압하기에 이른다.
 충돌이 점차 격화되자 전남대생들은 시위를 이어 나가기 위해 ‘금남로’로 이동했다. 이로써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시작된다. 5.18 기념재단연구소 안기정 연구원은 “박 대통령이 갑자기 시해되면서 우리 사회는 차기 대권을 두고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자유로운 투표와 민주 정치가 가능한 새 시대를 기대했다”며 “5.18 민주화운동은 이런 국민의 열망을 무시하고 정치군인들이 다시 기득권을 가져가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18일, 직접 방문한 전남대의 분위기는 당초 생각과는 달랐다. 평화와 여유가 넘치는 여느 교정과 다를 것이 없는 분위기였다. 36년 전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거센 저항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던 역동적인 교정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위대와 공수부대가 격렬히 맞붙었던 전남대 정문 인근은 교내 중심에 위치한 용봉관과 고즈넉한 가로수길로 이어져 있었다(사진 ®). 또한 많은 학생들이 교내 공원 잔디밭 곳곳에 돗자리를 펴고 캠퍼스의 낭만을 즐겼다. 이런 자유로운 일상의 교정 풍경이야말로 36년 전 전남대생들이 국가로부터 쟁취하고자 한 민주화의 가치이자 목적이었다.
 전남대생들은 5.18 민주화운동과 이에 앞장선 선배님들의 열망과 희생을 잊지 않았다. 전남대 재학생 박수환(26) 씨는 “당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선배님들을 생각하면 경이롭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과 신념을 위해 생명까지 내걸고 싸웠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재학생 김승경(20) 씨는 “아직 우리나라에 완벽한 민주화가 실현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선배님들의 뒤를 이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역할이 크다”고 말했다.
 전남대 언어교육원 앞에서는 5.18 민주투사들에 대한 애도와 홍보 활동을 위한 총학생회의 부스가 마련됐다. 부스 옆에는 당시 총학회장인 박관현 열사,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윤상원 열사 등 모교 선배들의 업적과 운동 과정이 적힌 팻말이 놓여졌다. 학생들과 전남대를 찾은 시민들은 이를 둘러보기 위해 걸음을 멈췄다. 전남대 5.18 민주화운동 홍보대사는 “학우들이 민주화 정신을 지키고 계승하는 데 일정 역할을 해야 한다”며 “당시 ‘해방 광주’ 시기의 협동심 등은 현재 대한민국에도 필요한 가치”라고 강조했다.

 금남로, 시민군과 계엄군의 시가전…“전두환이 광주 하나 정도 사라져도 괜찮다고 했다”
 계엄군은 금남로로 진출한 학생시위대는 물론 이들을 지지하는 일반 시민까지도 구타·체포했다. 결국 많은 부상자와 연행자들이 발생해 민주화운동의 불길은 점차 커져갔다. 그 다음날인 19일, 전남대·조선대 학생들과 시민들은 계엄군의 무자비한 시위 진압에 격분해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신군부는 점차 확산되는 시위를 막기 위해 광주에 11여단 병력을 증파했다. 금남로를 중심으로 시민들은 계엄군과 투석전을 벌이며 시위를 진행했다(사진 ?). 시민군 버스가 경찰저지선으로 돌진해 경찰 4명이 사망하고 광주역 광장에선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하는 혼란한 상황이 지속됐다.
 그리고 이틀 후, 시위대를 향한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금남로는 아수라장이 됐다. 군인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겨눴다는 사실에 시위대는 화순, 나주 등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해 무장했다. 또한 아시아자동차공장(현 기아자동차)에서 군용트럭 및 장갑차를 획득해 중장비도 구비했다. 결국 시위는 무력항쟁으로 변했고, 계엄군과의 치열한 교전 끝에 시민군은 금남로 끝에 위치한 도청광장 진입에 성공했다.
 금남로는 광주광역시 동구에 위치해 있는 길이 2.3km의 번화가다. 현재 금남로 구역 중 구 전남도청에서 구 광주은행 사거리 518m는 ‘유네스코 민주인권로’로 지정돼 있다. 5.18 민주화운동의 주된 장소로서 그 역사적 가치가 높은 지역이다.
 광주의 대표적인 번화가답게 금남로에는 양 도로변에 은행 등 금융시설, 많은 상점, 언론사 본사까지 들어서 있었다(사진 ?). 때문에 항상 많은 행인들과 차량으로 북적였다. 불과 36년 전, 시민들을 향해 총탄을 쏘는 계엄군과 시민군이 치열하게 대치한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대화된 곳이었다. 조미령(21·용봉동) 씨는 “대학이 광주에 있어 재작년 처음 금남로를 와봤다”며 “이곳이 영화로만 보던 5.18 민주화운동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에 놀랐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은 금남로가 지니는 ‘민주’와 ‘번성’의 의미가 값진 희생의 결과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광주 태생으로 평생 광주에서 살아온 70대 A 씨는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선 ‘전두환이 광주 하나 정도는 사라져도 된다’고 말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때 금남로는 전쟁터처럼 얼씬도 할 수 없는 곳이었다”며 당시 금남로를 회상했다. 또한 이범석(27·전남 화순) 씨는 “광주는 부마항쟁이 있었던 부산·마산 등지와는 색깔이 다른 것 같다”며 “우리나라 민주주의 정신을 이으려는 시민들의 노력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도청에 남은 시민들의 마지막 항전,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메시지
 22일, 도청광장에 시민군과 시민들이 총집결했다(사진 ?). 그 다음날, 종교인, 교수 등이 주축이 된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발족됐다. 5.18 수습대책위는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시민군은 무기를 반납하고,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절대 발포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계엄군은 수습대책위원회의 요구를 무시하며 시민군에 대한 강경 진압 의지를 꺾지 않았다.
 시민군은 무장해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두 갈래로 나눠졌다. 무기를 반납해 시민들의 추가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쪽과 끝까지 항전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뉘어 내분이 일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항전하기로 결정한 시민군은 전남도청에 최후 진지를 꾸리고 26일,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시켰다. 당시 광주는 외곽도로를 점령한 계엄군에 의해 철저히 고립됐고 시내전화는 일체 두절된 상태였다.
 다음 날인 27일, 마침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종료된다. 오전부터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세요’라는 가두방송이 끊임없이 나오던 때, 계엄군 탱크가 금남로에 진입해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은 전남도청에 진입해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해 도청을 장악했다. 그렇게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시작된 5.18 민주화운동은 군부의 진압으로 종료됐다. 이에 대해 5.18 기념재단연구소 안기정 연구원은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에 성공함으로써 5.18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나 분명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라며 “국가의 부조리한 권력에 국민이 직접 저항권을 발동한 실제적 사례로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광주 시민들이 전남도청 앞에 위치한 도청광장에 집결한 이유는 광주 시내에서 많은 군중이 집결할 수 있을 만한 넓이의 유일한 장소였고, 전남대·조선대, 광주역과도 가까웠기 때문이다. 금남로 끝에 전남도청과 광장이 위치하고, 인근 충장로를 따라가면 광주역이 나온다. 전남대는 또 광주역 바로 뒤쪽에 위치해있다. 직접 당시 5.18 현장을 방문해보면 9일 간 시민들이 항전한 곳이 결코 넓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과연 이 좁은 지역에 고립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열사들이 얼마나 큰 두려움을 느꼈을까.
 전남도청은 2005년 전남 무안으로 이전했고 현재 구 전남도청사는 ‘아시아문화전당’으로 재건축됐다. 그리고 그 앞에,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민주화를 위해 모였던 도청 광장이 있다. 인근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도청 광장은 유동인구가 많지 않아 한적했다(사진 ?). 중앙에 위치한 분수대에선 하얀 물줄기가 솟아올랐고, 그 옆에는 저녁 추모행사를 위한 무대시설 설치가 한창이었다.
 구 전남도청과 광장, 그리고 중앙에 위치한 분수대를 보니 광주 방문 전 본 민주화운동 사진이 떠올랐다. 마치 그때의 열기가 눈에 선하고, 함성이 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 했다. 민주화와 경제 부흥으로 준선진국 반열에 오른 오늘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광주라는 역사적 현장은 많은 메시지를 전해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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