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박정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전공·1)


 달력이 하나 생겼다 삼백육십오 개의 낱장으로 된, 집 앞 약국의 이름이 새겨진, 영정사진 같은, 눈을 갖다 대면 세상이 부연 꿈처럼 보이는 그 속에서 어머니가 말했다 화장실 휴지처럼 써도 되겠구나─ 그렇게 말씀하시니 꼭 살아계신 분 같네요, 대꾸했다

 달력을 뜯지 않아도 날은 흐르고 지나간 날들은 설화說話를 닮아 속삭이는 법을 알았다 머리맡에 달력을 놓아두고 잠든 날 아버지, 달력에서 걸어 나왔다 요새 두 분 다 왜 이러실까 아버지를 번쩍 들어 아무 날에 쑤셔 넣었다 언제고 다시 오마 아버지는 말과 함께 구겨지고 혼자 남은 방 낱장들과 널브러진 채 나는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겨울이 됐다 아버지가 헤엄치며 수요일 위로 떠올랐다 청년의 얼굴이어서 그라고 부르고 싶었다 물 젖은 발자국을 남기며 그, 옷장 속으로 숨어들었다 내 친구들은 다 죽었어 총소리가 멎으면 그때 나를 불러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누군가와 함께 사는 법을 물었으나 아무도 몰랐다 고민하다 옷장마저 묻었다 그 해의 마지막 날에

 무덤처럼 솟아오른 토요일 옷장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기어 나왔다 벌거벗은 아기의 모습으로 늘 그렇듯 어린 것들은 힘이 없어 아버지는 다만 잊혀진 기념일처럼 흐릿하게 종잇장에 눌어붙었다 어제라고 부를 수 있는 날들은 모두 찢어지고 나는 이제 자정의 각도로 달력을 바라본다 버려진 날들은 어디로 가는가

 

  충대문학상 시부문 심사평

  독특한 시적 울림

  많은 응모작들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문학 창작에 많은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눈여겨볼만한 작품이 많지 않다는 것은 문학 창작을 심심풀이의 여기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창작은 자유이지만, 응모는 심각한 일이다. 응모자들의 좀 더 진지한 성찰을 바란다. 심사위원들에게 최종적으로 논의된 작품들은 「달력」 「기억의 교차」 「신발을 믿습니까」 「바람의 노래」 「칠판」이다. 모두 일정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 일정한 수준이란 노골적 감정 표현의 수준을 넘어서서 시적 감춤과 비유적 구체의 언어를 다룰 줄 아는 수준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본심 대상작들 중에도 일부는 여전히 시적 감춤을 애매한 의미 놀이의 차원에서 이해할 뿐 세계의 시적 창조라는 구체성의 차원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심사위원들이 최종적으로 관심을 가진 작품은 「달력」과 「기억의 교차」인데, 「기억의 교차」는 사회적 관심사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의 깊이가 부족하다. 시적 울림이 상식적이라는 말이다. 이에 비해 「달력」은 시적 구체성에서 한계가 있으나 시적 울림의 차원에서 독특하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은 언어적 고민이 새로운 상상력 전개와 닿아있는 「달력」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심사위원
박수연(국어교육과 교수)
이형권(국어국문학과 교수)

 

충대문학상 시부문 당선소감

사진. 박정윤

 오늘도 나의 문장들이 되어준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 라는 문장을 쓴 적이 있습니다. 1년 전쯤의 일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나의 문장들이 되어준 사람들에게 오늘도, 감사합니다. 그들이 미문이 아니었어도 설령 비문이나 오문으로 적혀 나를 힘들게 만들었더라도 그렇습니다.
 시를 처음 쓸 때가 생각납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드러내야 하는 거지? 애써 감추면 사람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하고, 내보이면 좀 부담스럽다고 고개를 흔들고. 요새 들어서야 그 ‘정도’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듯싶은데 이제는 소감을 쓰고 있습니다. ‘정도’ 위에서 비척비척 걷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책상 위에 친구들이 적어준 롤링페이퍼가 있습니다. 한구석에 제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어놓은 것도 보입니다. 박수, 정성, 윤기. 내 이름이 이렇게 좋았던가 싶습니다. 그걸 떠나서라도 사실, 잉크로 이름이 적힌다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니까. 그래서 저는 지금도 설렙니다.
기분을 틈타 말합니다. 오래도록 감사하고 싶습니다. 계속 걷고 싶습니다. 늘 설레고 싶습니다. 더 쓰겠습니다. 계속 쓰겠습니다. 놓치지 말고, 지켜봐주세요. 아직도 자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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