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싫다

 

곽효원 편집국장

 마감이 다가온다. 묵직하게 써야한다는 부담감에 미뤄뒀던 칼럼의 압박도 시작된다. 이번엔 무엇을 어떻게 전달해야하나 고민을 거듭한다. SNS도 살펴보고 학내 커뮤니티도 돌아본다. 인터넷은 ‘여성 혐오’, ‘남성 혐오’, ‘성소수자 혐오’ 온통 혐오로 가득하다. 머리가 아파와 인터넷 창을 끈다. 글쓰기 싫다는 생각이 밀려든다.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이 연일 시끄럽다. ‘안전한 사회’와 ‘성 평등’으로 나아갔어야할 담론이 ‘여성 혐오 대 남성 혐오’에서 맴돌고 있다. 해당 살인사건은 여성들이 노출돼있던 공포의 기폭제가 됐다.
 여성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논의가 필요했다. 여성 역시 남성과 같은 사회에서 살아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와야했다. 더불어 징병제, 남성다움의 강조 등 억압받는 남성들의 인격권에 대한 고민도 필요했다.
 그러나 논의는 ‘여성 혐오 대 남성 혐오’로 변질됐다. 담론보다는 이분법만 반복되고 있다. 남성을 이야기하는 집단은 ‘일베’로 여성을 말하는 집단은 ‘메갈’로 낙인찍히고 있다. 모든 말과 글이 일베와 메갈로 규정되며 논의는 기능을 상실했다.
 김조광수 감독과 레인보우팩토리 김승환 대표의 동성결혼 신청이 각하됐다. 혐오 발언 역시 이어졌다. ‘똥꼬충’, ‘정신병자’ 온갖 혐오 발언들이 나타났다. 동성애를 옹호하면 ‘호모새끼’로 규정됐고, 혐오 발언의 표적이 됐다.
 소수자에 대한 담론은 죽었다. 성소수자가 한국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제도적, 인식적 논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혐오 표현의 사실 여부가 우선시 됐고, 진지한 접근은 ‘진지충’, ‘선비’라고 규정됐다. 혐오 발언 속에서 성소수자는 논의가 아닌 조롱의 대상일 뿐이었다.
 기득권 유지에는 낙인과 혐오의 역할이 크다. 논의를 희화화시키고, 담론을 갈등에 머물게 한다. 기존의 틀은 작은 균열에서 붕괴된다. 이 균열을 틀어막는 것이 낙인과 혐오다. 균열과 혼란은 당연히 불편하다. 지금의 구조에서 이익을 챙겨왔던 기득권층이라면 더더욱 불편할 것이다.
 낙인과 혐오로 얼룩진 현태들을 보면 담론은 소설 속에서만 가능해보인다. 낙인와 혐오는 도처에 있다. 가끔은 이런 상황에서 글을 쓰는 게 다 무슨 소용이랴 싶다. 이 글 역시도 낙인찍히고 혐오 받을 것임이 분명할 텐데.
 정말 글쓰기 싫은, 표현이 두려운 시대다. 그럼에도 글을 쓴다. 작은 균열이, 논의로, 담론으로, 변화로 이어질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고민은 멈춰져서는 안 된다. 낙인과  혐오로 변화를 틀어막는 자,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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