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도 끝자락에 접어들었다. 2015년은 이제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았다. 두어 주만 지나면 이번 학기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충대신문은 종강호이자 2015년의 마지막호를 장식하게 되었다.

  옛 성현과 문호들은 ‘끝’을 예찬하는 데 하나같았다. ‘끝맺기를 시작할 때처럼 하면 실패가 없다’(노자), ‘끝이 좋으면 모두가 좋다’(셰익스피어), ‘시작하는 재주는 위대하지만, 마무리 짓는 재주는 더 위대하다’(롱펠로), ‘아름다운 시작보다 아름다운 끝을 선택하라’(그라시안) 등 전부 열거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정도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한 선행 요건이 있다. 연유가 어떻든 과정에서 드러난 시행착오를 바로보고 행여나 불거진 앙금을 해소하는 일이다. 우리 대학은, 지난 여름 대학 자치를 호소하며 투신한 부산대 고 고현철 교수의 죽음 이후 총장 선출 방식을 둘러싸고 극심한 내홍을 겪었다. 이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대학본부와 교수회 모두 우리 대학의 발전을 찾으려는 취지에서 빚어진 갈등이다. 그저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서로의 견해가 부딪히는 과정에서 상대에 대한 존중이 다소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기에 감정의 앙금만 쌓인 채 각자 일방으로만 통행했다.

  기본적으로 설득은 상대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선, 설득은커녕 소통조차 쉽지 않다. 제 아무리 중한 죄를 범했더라도 꾸짖고 탓하기에 앞서 그 처지부터 헤아려야 한다. 마음으로 통하지 않는 설득은 난망한 일이다. 이를 위해선 설득당하는 사람이 말을 더 많이 하게 해야 한다. 그 편이 설득에 유리하다. 역설적이게도 설득을 포기할 때 설득력이 가장 높아지는 법이다.

  소통의 출발을 경청이라 하는 이유도 상대의 처지를 이해함은 물론 마음을 얻으리라는 취지에서다. 한때 천하를 호령한 칭기즈칸은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몰랐다고 한다. 대신 늘 귀를 열어두고 누구의 말이든 주의 깊게 들었다. 스스로 “내 귀가 나를 가르쳤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의 생활철칙은 ‘우선 적게 말하라’와 ‘듣지 않고는 결정하지 마라’였다.

  정보는 널려 있고 지식수준이 높아진 이 시대에 사람들은 더 이상 논리적으로 설득당하는 걸 원치 않는다. 아무리 옳은 말이어도 내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한 귀로 흘리거나 은근히 거부하기 마련이다. 이치에 맞는 말이라도 정서적으로 공유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인 셈이다. 지위나 논리 대신 진심으로 반응하는 ‘감성소통’ 또는 ‘공감’이 회자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직이든 개인이든 실수하거나 잘못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사과하면 된다. 투명성이 높은 서구에서는 ‘사과 현상(apology phenomenon)’이란 말까지 있다. 이 용어가 가리키는 메시지는 두 가지다. 사과는 기법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며, 진심어린 사과는 전화위복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과는 굴욕이 아닌 교감이며, 루저(loser)가 아니라 리더(leader)의 언어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지금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떻게 시작하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끝내는가이다. 우리 대학은 지나온 세월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대한민국의 중부권을 대표하는 거점 대학으로 제 구실을 다해야 한다. 가슴 속으로 대의를 품되 시선은 구성원 하나하나의 마음을 보듬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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