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만난 북한이탈주민 우리 학교 졸업생(사회복지·11)

 

출처. 공동경비구역 JSA

  ‘북한.’ 한 마디로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 가장 가깝지만 가장 멀게 느껴지는 것이 북한이다.
 우리가 북한에 접근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북한 정권에 대한 증오와 불신감. 둘째, 북한 동포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
 한민족이라는 사실이 무뎌질 만큼 서로 미워하고 괴롭히고 있는 형상이니 지구 반대편에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우리가 한민족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나고 자란 환경이 다를 뿐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다.
  이제부터 지금 우리 나이에 북한에 살았던 한 동포(사회복지·11)의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20살의 한 젊은이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탈북을 결심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죽지만 김일성은 안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도 어리석었다.” 김일성 시대의 사람들은 김일성에게 많이 의존했고, 김일성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북한이탈주민 A씨는 “내가 일하고 돈을 벌어도 김일성이 준다고 생각을 했다. 어린 마음에도 세뇌가 돼 있어 김일성이 죽으니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시련은 곧바로 닥쳐왔다. 그것은 극심한 배고픔이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배고픔이 눈앞에 닥쳐왔다. 그 무렵 부모님도 돌아가셨다. 먹을 것을 주고 심하게 굶지 않았다면 이 나라를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함흥은 공업도시로 유명하다. 농촌보다도 공업단지 주변은 공장에서 일을 하다 보니 생활수준이 높았다.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란 덕에 생활은 그리 궁핍하지 않았다. 그는 “북한에는 노동자가 굉장히 많다. 여기로 말하면 직장인이라고 볼 수 있다. 함흥은 공업도시다 보니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함경 같은 경우 옆집이나 윗집이나 생활수준이 어릴 때는 거의 비슷했다. 먹는 것, 입는 것에서 별로 힘들어하진 않았다. 잘 산다고 해서 여기처럼 모든 걸 다 갖추고 산 그런 삶은 아니어도 적어도 배부르게 먹고, 나가서 문화생활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동국대 북한학과 김용현 교수는 “김일성이 생존해있을 때만 해도 북한 경제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김일성 사망 후 북한은 사회주의권 붕괴라는 대외적 위기 상황에 놓였고, 홍수와 가뭄으로 북한 주민들의 대량 아사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면서 북한경제가 굉장히 나빠졌다”고 말했다. 1990년대 중후반 동구권의 붕괴로 북한은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최악의 식량난으로 배급제가 무너지며 아사자가 잇따라 나왔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아사자는 33만여 명에 이른다.
  북한이탈주민 A씨는 “이 형편이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김일성이 죽은 이후 집집마다 조금씩 생활의 차이가 났다. 3-4년은 한동안 국가 자체가 뾰족한 수 없이 방황하는 시기였다. 탈북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어렵다고는 생각을 못 했다. 우선 북한이라는 사회 안에서 다른 세상을 못 봤기 때문이다. 북한은 외국에 나갔다 들어오면 나가서 들은 것을 가족에게조차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사유서를 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기 때문에 현재 삶에 만족하고 사는 것이다. 더 많은 욕심을 내고 싶지만 낼 수 없었고, 다른 사람보다 연필 하나 책 하나를 더 갖는 걸로 만족했다”고 말했다.
  이것은 94년 이전의 삶이었고, 이후 김일성이 죽으면서 배급제가 붕괴되며 그는 고난의 행군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는 망명길에 올랐다. “하루 세 끼 배불리 먹으면, 배불리도 아니고 굶지만 않으면, 안 온다고 했다. 하루 세 끼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굶어 죽으나 오다가 붙들려서 죽으나 죽는 건 한 가지니까.”
동국대 김용현 교수는 “사람들이 정치적인 의도나 이유 때문에 망명한 것이 아니라 경제가 나빠지니까, 생활이 안 좋아지니까 탈북을 한 것이다. 한 마디로 생계형 탈북”이라고 말했다.
  북한이탈주민 A씨는 “이 사회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기 전에 너무 배고프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탈북을 할 때도 북한에서 도망 간다는 생각으로 나온 게 아니라 돈을 벌어서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다. 94년 이후부터 99년 사이에 탈북한 사람들은 너무 심한 벌은 받지 않았다. 국가도 그때는 엄청 힘들었다는 걸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을 이탈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탈북을 할 당시 남조선은 알아도 한국은 몰랐다. 한국이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은 알아도 그것이 민주적인가는 몰랐다. 그는 “텔레비전에서 남한에 대한 보도를 할 때 헌병에 맞서서 최루탄을 던지고 시위하는 동영상이 잠깐 스치듯 나오는데, 사람들이 왜 저런 시위를 하는지는 설명을 안 해준다. 남한은 자본주의 사회라서 폭동을 일으키고 싸운다고만 말한다. 남조선은 무서운 나라라는 위협을 주다 보니 북한에서 나올 때 남조선을 간다고 생각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삶은 생각했던 것처럼 순조롭지 않았다. 돈을 벌 수는 있지만 신분이 명확하지 않았기에 불안해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중국에 가서 알았다. 계속 숨어살게 되고 그런 삶이 6년 동안 지속되며 점점 지쳐갔다. 그러던 중 돈을 벌려고 한국에 갔다 오는 조선족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이 중국보다 살기 더 좋은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그는 한국행을 선택한다. 한국에 가면 집을 준다는 어렴풋한 얘기를 들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국적을 준다는 그것 하나 때문이었다.
  그는 중국에 있는 동안 신변 위험 때문에 숨어살다 보니 한 번도 고향에 소식을 넣어본 적이 없었다. 한국에 온 다음 바로 사람을 찾아 연락해봤지만 닿지 않았다.
  그는 “집은 이동을 안 했지만 주소가 바뀌어서 갈 때마다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그 지역에 오랫동안 사셨던 분을 통해 가족을 찾아 데리고 왔다”고 말했다.
  한 가족 안에서 몇 명이 없어지니까 남아있는 가족들은 당연히 감시의 대상이 됐다. 집에 누가 오면 공안당국에 가서 보고해야 했다. 그는 “이런 것이 감시인 것이다. 집 밖으로 한걸음 옮기기도 힘들고 누군가 내 집에 방문하는 것도 힘드니까 사람을 보내도 발붙이기가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A씨가 탈북한지도 이제 어언 16년이 됐다. 그는 북한에서 부모님과 네 자매가 그리 넓지 않은 집이지만 웃고 울고 떠들었던 그때 그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남한으로 데리고 온 언니들도 있지만, 아직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있다. 그는 “여기 오면서 부모님 사진을 한 장도 못 가져왔다. 언니들도 오면서 사진 한 장도 못 가져왔다. 부모님이 돌아가신지 20년 가까이 되는데 얼굴이 좀 아련하다. 사진이 있으면 생각이 날 텐데 사진 자체가 없으니까 어떻게 생겼는지 되새기려고 해도 잘 안 된다”며 슬픔이 묻어 나오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지금도 한국에서 제2의 삶을 시작한 때가 ‘한 살’이라고 생각한다. 2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다시 새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는 현재 삶에 만족한다. 그는 “후회하거나 불만이 있거나 하는 건 전혀 없다. 살면 살수록 오히려 국민들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갖는다. 지금은 일을 하면서 세금을 내고 살지만, 이 세금이 모여 나도 정부 지원을 받았고, 같은 동포지만 남한에서 우리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고 말했다. 그가 사회복지 쪽으로 관심을 가진 계기도 이런 연유였다. 그가 받은 것에 대해서 그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돌려주고 자신의 손이 가는 곳에서 그들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A씨는 한국에 살며 달라진 마음가짐으로 두 가지를 꼽았다. 첫째는 한결 부드러워진 말투이다. 두 번째로는 상대방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는 “북한에서는 발언에 대한 자유가 없고 위에서 지시를 내리면 그대로 따라야 했다. 불만이 생겨도 말을 못 했다. 중국에서도 억압을 받았다. 신분이 없어 일을 해도 돈을 안 준다거나 마음에 안 들면 때린다거나 해도 살아남아야 하니까 발언권을 가지지 못 했다. 한국에 와서 억눌려있던 감정을 표출하다 보니 대화 도중에 ‘나는 무조건 널 이겨야 돼. 말로라도 널 이겨야 돼’라는 마음이 강했다. 그런데 이제는 상대방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말했다.
  지난 어느 날, 하누리 단체에서 그를 18세 미만의 중증장애인 요양 시설로 데려갔다. 한 아이가 하루 종일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면서 그를 보며 연신 싱글벙글 웃었다. 밥을 먹는 시간에 보니까 웃는 것이 아니라 턱관절 장애를 앓고 있어 입을 다물 수 없는 아이였다. 아이는 입을 다물지 못해 밥을 삼킬 수도 없다. 밥을 입안에 넣어주고는 강제적으로 턱을 올려주면 아이는 밥을 씹는다기보다는 밥을 삼키는데, 그는 힘든 시기에 그러한 광경을 보고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있구나’하고 느꼈다.
  그는 봉사라는 개념도 모르고 따라간 그곳에서 ‘건강한 것에 대한 감사함’도 느꼈지만 “그전에는 대한민국의 좋은 집, 좋은 차, 옷, 가방…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면 봉사를 갔다 온 다음에는 전에는 보지 못 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2011년 그는 특별전형으로 우리 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한다. 그러나 대학 생활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그는 “생각해보면 대학교 때 너무 많은 것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배우고 싶다고 왔지만 내 전부는 열어두지 않고 누군가 내가 이탈주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싫었다. 은둔 생활을 했던 것이 지금 와서는 엄청 후회된다”고 말했다.
  때로는 의욕이 떨어지고 슬럼프가 찾아오기도 했다. 학생들 틈에서 시험을 치러 상대평가를 받는데 좋은 성적을 받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학내에 있는 이탈주민들끼리 서로 의지하며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는 “이후에 20대 아이들과 경쟁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4학년을 졸업하겠다는 목표를 가지면서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그러면서 학교 안에 뭐가 있는지 보게 되고 즐겼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학과 공부 이외에도 그를 정말 힘들게 한 것은 ‘관심의 부재’였다. 그는 “이탈주민들은 굉장히 소수다. 때로는 이런 학생들도 있으니까 한번은 학교에서 불러서 학교 다니는데 어려움은 없는지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북한이탈주민들은 대학 문화도 모르지만 다양한 학내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어도 방법을 몰라 어려워한다. 그는 “사람이 관심이라는 자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관심에 따라 의지가 생길 수도 있고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라며 “조그만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소수의 북한이탈주민이 우리 학교에 재학 중이다. 이처럼 주변에서 북한이탈주민을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만은 않은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동국대 김용현 교수는 “북한이탈주민의 수가 2만 명을 넘어서 3만 명의 시대로 돌입했다. 이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 안착할 수 있도록 우리 국민과 정부가 최대한 신경을 써야 한다. 이조차 못한다면 남북통일 과정에서 북한 주민들과 하나 되는 것이 어려워진다고 봐야 된다”며 “북한이탈주민들이 한국 사회에서 자생할 수 있도록 주변의 따뜻한 시선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허채은 기자 gwo12@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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