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시 반포면 <계룡산도예촌>편

 

 

   “수많은 먼지가 모여 우주를 이루는 것처럼 우리 각자는 먼지만큼 우리 시대의 역사를 쓰는 사람이다.” 역사라는 틈에 끼어있는 아주 작은 존재이지만 철화분청사기가 지닌 역사성을 담아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역할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대전 시내를 벗어나 박정자삼거리를 지나 좌측편 상신리로 접어들면 가까이 꽤 큰 산이 보인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돌아 얼마간 들어가면 작은 산골마을이 반긴다. 첩첩산중이란 말이 실감 나는 마을의 이름은 계룡산도예촌이다.
  도자기 전통이 오래된 일본 아리타의 도자기 축제는 이삼평 공의 제사로 시작된다. 이삼평 공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서 자기의 원료인 백자광을 찾아내어 일본 최초의 백자를 빚은 조선 출신의 도공이다. 도예촌 사람들은 이삼평이 없었다면 아리타가 없었고 아리타가 없었다면 유럽 사람들이 조선의 도자기를 잘 몰랐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삼평 공의 고향은 바로 이곳 계룡산 일대에 있다.
  이처럼 계룡산 주변은 이미 오래전부터 도자기로 유명했던 곳이다. 계룡산에서만 빚어졌던 철화분청사기 역시 이를 증명하고 있다. 도자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도자기는 자연에서 캐온 흙이면 빚을 수 있고 그 흙은 전 세계 어디에서든지 쉽게 구할 수 있는 흙이다. 흙이 가진 질박한 느낌을 가장 다양한 모습으로 빚어낸 것이 바로 조선의 분청사기(분장회청사기)다. 그중에서 계룡산도예촌은 ‘철화분청사기’를 빚는 마을이다. ‘조선 도자기는 조선 사람이 잘 빚는 것처럼 철화분청사기는 계룡산 자락에서 빚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을의 시작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제일 먼저 발굴한 가마는 계룡산 가마였다. 발굴이 무색할 만큼의 도굴에 가까웠다. 우리나라 도자기들은 일본이나 중국처럼 무역을 하지 않고 자체 생산·수급했기 때문에 숫자가 적었다. 그것마저도 일본에 수탈당해 원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조선의 질박한 그릇에 대한 일본의 집착은 철화분청사기로까지 이어진다. 실제 좋은 철화분청사기는 일본에 많이 있다. 계룡산도예촌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철화분청사기를 복원하고 현대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릇 표면에 귀얄 붓으로 백토 분장을 하는 양미숙 작가

  계룡산도예촌 <웅진요> 양미숙 작가는 “기술이 발전해 농작물이 훨씬 깨끗해지고 양도 많아졌지만 사람들이 못생긴 유기농 식품을 먹으려는 것처럼 정제된 깨끗한 도자기가 공장에서 막 찍어져 나오는데도 지금도 사람들이 좀 부족하고 못생긴 생활도자기로 밥을 먹고자 하는 이유는 자연에 가까운 유기농 음식을 찾는 것처럼 사람의 감성에 가까운 도자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청자, 백자보다는 분청인 것 같아서 분청이 좋다”고 말했다.
  계룡산의 철화분청사기가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사실 격의 없는 편안함에 있다. 철화분청사기는 그 시작과 끝이 모두 도공의 손에 달렸다. 양 작가는 “도공의 그림은 낙서 같기도 하다. 물감 자체는 투박한 맛이 있다. 철화분청사기는 질박하고 해학적이다. 어떤 때는 편안하고 어떤 때는 멋스럽고 어떤 때는 힘이 있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철화분청사기는 자유로움이 허락된 도자기다. 물론 복원이나 계승도 꼭 해야 하는 일이지만 우리 시대의 우리 얼굴로 우리 방식으로도 빚을 수 있을 것 같다. 똑같은 사람이지만 그의 사상과 생각이 다르고 우리는 그것을 옛날처럼 획일화하지 않고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존중한다. 그래서 나는 철화분청사기가 현대인들한테 다가가기 굉장히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1992년 계룡산도예촌을 조성했던 젊은 도예가들은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중년의 나이로 접어들었다. 그들의 자식 중 누군가는 부모의 지난 20년을 좇아가며 도예촌의 맥을 이어나갈 것이다. 
  양미숙 작가는 “느린 걸음으로 조금씩 가는 세월인데 96년부터 공방에서 도자기를 빚었다. 굉장히 지루하고 더디고 힘든 시간이었는데 그만한 세월의 보상은 다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20년을 비춰봤을 때 건강이 허락한다면 앞으로 점점 더 행복하게 도자기를 빚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평범한 소시민이지만 그 삶을 기쁘게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 우리 마을은 그런 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글/ 허채은 기자 gwo12@cnu.ac.kr
사진/ 충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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