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고려의 독도인식

 

 

  우산국을 병합한 신라는 이후에 가야를 합병하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원하는 천하를 완성했다. 그렇지만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를 완전히 통합시키지 못하고 많은 영토가 당나라에 편입되었다. 또 나라를 잃은 유민들은 포용되지 못하여 이국을 떠도는 유랑민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신라에도 당나라에도 속하지 못하고 유랑하다 대조영의 건국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발해는 해동성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성했지만 국경을 접하는 신라와는 교류하지 않았다. 신라는 소아적 천하의 완성에 만족하는 듯했으나 200여년이 지나자 천명을 받았다는 세력가가 각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자, 궁예도 후고구려를 세우고 다투는 가운데, 왕건이 주군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그런 천하의 동향을 살피던 우산국이 사신을 고려에 파견하자, 왕건은 그들에게 정위와 정조라는 벼슬을 내리고 936년에 천하를 재통일했다. 그리고 우산국을 강원도 울진현에 편입시키면서 울릉도라 칭하고 신라인들의 우산국에 대한 인식을 정리했다.
  성인봉을 중심으로 하는 울릉도의 설명이 효율적인데, 동방으로 만보, 서방으로 1만 3천보, 남방으로는 1만 5천보, 북방으로 8천보를 가면 바다에 이른다는 내용이나 그 넓이가 100리라는 내용은 주민들의 오랜 경험에 근거하는 것으로 사실에 부합한다. 그리고 울릉도의 위치를 고려 울진현의 정동해중, 즉 고려의 동해에 존재한다는 사실과 울릉도를 우산국이라고 칭한 사실, 우산국을 우무릉으로도 칭한 사실도 기록했는데, 고려인들의 독도인식이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일본은 그런 기록을 근거로, 우산국과 울릉도는 같으므로, 우산국에 독도는 포함되지 않는다며, 신라나 고려가 독도의 존재를 몰랐다는 주장을 한다. 그래야 1905년에 동해에서 주인이 없는 독도를 발견하여 일본에 편입시켰다는 무주지 선점론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신국이 울릉도와 그 주변의 섬, 그리고 울릉도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독도를 영토로 하는 국가였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고 국(國)과 도(島)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주장일 뿐이다. 그것은‘우산과 무릉은 본래 2도인데,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서, 바람이 부는 맑은 날에는 서로 바라볼 수 있다,’라는 기록과도 어긋난다.
  동해에는 예나 지금이나 울릉도와 독도만이 존재하는데, 그런 사실을 정확히 반영한 내용으로, 신라나 고려의 동해 인식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은 그런 사실을 무시하고 동해의 2도를 울릉도와 독도가 아닌, 울릉도와 동방 4km 앞에 있는 죽도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죽도는 눈비가 내리는 날이나 안개나 구름이 끼어도 울릉도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어, 바람이 부는 맑은 날에나 볼 수 있다는 기록과는 맞지 않는다.
  울릉도와 독도의 실제 거리는 배를 저어 가면 하루가 걸리는 거리로, 93 킬로미터, 즉 230리의 거리다. 그래서 울릉도에서 독도를 볼 수 있는 날은 1년에 고작 35일 정도다. 그런 지리적 인식, 신라 시대 이전부터 울릉도 거주민들의 인식을 고려가 정리한 것이다. 고려가 얼마나 정확히 동해의 울릉도와 독도를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을 지근거리인 것처럼 기록한 것은 광활한 해상에서 가깝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고 바람이 부는 날, 즉 바람이 안개나 구름을 날려 보내는 맑은 날에나 볼 수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오랜 경험에 근거하는 사실을 감성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처럼 울릉도와 독도의 관계를 정확히 전하는 기록이 있음에도, 그것을 울릉도와 죽도 간의 기록으로 단정하는 논리를 개발하여 발표하고, 일본은 또 그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 선조들의 독도인식 자체를 부정하려고 한다. 그것은 침탈로 축적한 부를 근거로 발전시킨 인문학의 지식을 침략의 논리로 연계시키는 일본이기에 가능한 주장이다.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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