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외침

 

      고독한 외침                이나영(한양대학교 한국언어문학과·2)

 

출처.http://contest.cheongshim.com/portfolio/%EC%95%84%EB%B2%84%EC%A7%80%EC%9D%98-%EB%92%B7%EB%AA%A8%EC%8A%B5/

 

  아버지는 늘 말이 없으셨다. 
  다만 여러 독촉 고지서 앞에서 가족들을 비껴 앉으셨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항상 정치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보이시고는 했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의 아버지를 회상하노라면, 티비 속 인물을 삿대질 하며 욕도 서슴지 않던 모습만이 내 기억의 전부이다. 그때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싫지가 않았다. 우리의 살림은 풍성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부를 비판할 권리조차 쪼그라드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몹시도 답답해 하셨다. 심지어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보일 때도 있었던 것이다.
  종종 어머니는 한숨을 삼키며 말하고는 하셨다.
  “제발 가정이나 어떻게 하고 나랏일에 관심을 가지시라구요. 일단 우리 집부터 걱정할 일이지 그렇게 허공에 대고 소리쳐 봐야 누가 알아 주기나 한다던?” 
  아버지는 들은 체하는가 싶더니 이내 티비의 볼륨을 높이셨다. 높아진 음량만큼 어머니의 언성 또한 커졌다. 심지어 집안 살림마저 온전하지 못 할 것 같은 험악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집 안의 가재도구들이 깨져 그 파편이 흩어지는 상상을 할 때면 나의 영혼 또한 바스라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눈을 꼬옥 감았다.
  ‘눈을 감고 무한까지 세고 있으면 이 다툼도 끝이 나 있을 거야.’ 여린 이파리 같았던 그때 그 시절의 나는 그렇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저 부모의 싸움이 끝나기를 바랐다. 겨우겨우 버티면 내게 찾아오는, 이후의 적막한 고요와 그만큼의 안도. 당시에 내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아버지의 그러한 점을 그대로 내가 물려 받았던 것이었을까? 사춘기 시절의 나는 내 또래 아이들과 정치, 사회적 이슈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소녀였다. 나는 지금 아이의 몸을 하고 있지만, 이런 사회적 논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 여느 중고생과 나를 구분 지어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 그런 것도 알아? 난 정치 얘기는 잘 모르는데.” 라고 말하는 또래의 말을 들을 때마다 겉으로 미소 짓고 속으로는 조소했다. 
  ‘그래 딱 그 만큼이 너와 나의 차이란다.’
  아버지는 수 년이 흐른 후에도 티비 속 정치인들을 홀로 대적해 오셨다 . 
  여전히 가족들에게보다는 브라운관을 향해서 외치는 말의 수가 많으셨다. 모니터 안의 정치인들은 더욱 몸집이 불어 있었으며 재산 또한 늘어 갔지만, 나의 아버지는 어째 점점 야위어 가는 듯했다. 단지 초라한 중년의 모습으로 그렇게 티비 앞에 앉아 계셨던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그것의 성질이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지 간에 우리가 정부를 비판할 권리는 쪼그라들어지는 것 같았다고.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와는 달리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초라해지기 싫었으며 어떤 의견을 내더라도 그 말의 울림이 탄탄한 인간이고 싶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렀고, 나는 재수를 하여 대학에 입학하였다. 입시라는 녀석은 너무나도 거대했기 때문에 그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러는 동안에 내게 일어난 변화가 있다면, 교복 입던 시절의 나와는 반대로 이제는 더 이상 정치 이야기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자랑스레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는 일도, 그러한 담론이 형성될 만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일도 더는 없었던 것이다. 나의 발화가 힘이 있어지고 뼈가 붙을 때까지 내 앞가림만 잘 하기로. 그 이상의 것에는 단 1g의 관심도 가지지 않기로.
  나는 죽을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지 대학 입시라는 것을 결과만 두고 평가하게 된다면 나는 죽을 만큼 하지 않은 아이가 되어버렸다. 나의 굳고 단단한 의지는 그렇게 가슴 속에 아픔으로 남았다. 내 존재는 더욱 더 작아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나가 어긋나더니 모든 것이 틀어졌다며 스스로를 깎아 내렸고, 그러한 아픔을 품고 대학 생활을 했다. 봄날 캠퍼스의 햇볕은 따뜻했지만, 태양의 따뜻함을 오롯하게 느낄 수는 없었다. 반쯤 겁에 질린 채로 야망이 없는 대학생이 되었고, 그렇게 반이 죽은 몸으로 진리의 상아탑을 누볐던 것이다. 대학생이 되면 다시 시작하기로 했던 사회 문제에 대한 논의도 더는 미련이 없었다. 무엇이든 사회에 대적하여 나의 주장을 자유로이 펼칠 여력도 남아 있지가 않았다. 
  어릴 때는 사회과학 혹은 인문과학서 모두 좋아하던 나였는데, 몇 년 동안 줄기차게 보아왔던 수험서 밖으로 나가기가 이제는 무서웠다. 소설 외의 것은 읽기가 겁이 났다.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으므로, 다만 나에게 허락된 일은 그저 묵묵히, 의견 피력 따위는 하지 않고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내가 어렸을 때 무시했던 친구의 환영이 보인다. 그 친구는 대입의 문에서 내가 바라던 대학의 타이틀을 따고 내게 웅얼거렸다. 잘 보이지 않아 눈을 가늘게 뜨고 친구의 웅얼거리는 모습에 초점을 모았다. 조금 있다가 시야는 선명해졌으며 곧이어 입 모양이 명확하게 다가왔다.
  ‘그래 딱 그 만큼이 너와 나의 차이란다.’
  나의 영혼이 슬프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던 나날들이 이어지던 때에, 잊고 살았던 고교 동창의 갑작스런 환영은 나에게 꽤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찰나의 순간에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번뜩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는데, 아버지는 먼저 희미한 심상으로 내 눈 앞에 다가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이 점점 명확해졌다. 동시에 아버지의 야윈 뒷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왠지 모를 파동이 심장에서부터 번져왔다. 이는 사회나 혹은 그 친구를 원망하는 감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버지가 이해되는 순간이 나를 스쳐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등장은 다소 뜬금없었기에 나로 하여금 어떻게 여기까지 사고가 닿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일말의 교집합도 없는 이 순간에 왜 하필 아버지가 떠올랐는가?
 뒤미처 한 번도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아버지 편에 서서 무언가를 생각해보려고 한 적이 없었던 내 자신에게 후회가 밀려왔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 왔던, 아버지의 그 정치인을 향한 외침은, 혹시 소통의 부재가 가져다 준 무언가는 아니었을까? 혹은 가장으로서 책임의 무게를 토로하는 방식의 일종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쉽게 해결할 수 없는 현실 문제에 대한 자조는 아니었던가? 나는 어느 한 무엇이라고 확언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짐작하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사실 아버지가 이해되는 그 순간을 대면하였음에도 나는 아직 겁에 질린 채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의 등을 보고 따뜻하게 꼬옥 껴안아 드릴 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사회적 담론을 형성할 용기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하고도 분명한 것은, 이제 나는 나와 같은 이들을 보고서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요즘에도 아버지는 계속 말없이 티비를 보고 계신다. 여전히 그의 옆에는 각종 납부 고지서 또한 흩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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