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벽장 속의 그대에게

 

 

 

  사회면 취재를 할 때는 담쟁이 넝쿨같은 심정이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벽을 오르고자 애썼다. 그러나 이번 성소수자 취재는 달랐다. 기자 앞에 놓인 것은 벽이 아닌 얇은 보호막만을 지닌 달걀이었다. 몇 번이고 인터뷰 요청서를 넣었고 인터뷰를 부탁했다. 그럼에도 취재는 쉽지 않았다. 그들은 조심스러웠고 신중했다. 수없이 문을 두드렸고 결국 달걀 껍데기 안으로 잠시 들어갈 수 있었다.
  취재를 하며 들은 이야기 중 하나는 이런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는 것이었다. 성소수자의 인권은 성소수자들만 주장해서는 안 된다며, 사회 구성원 전체가 함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시가 떠올렸다. 잠시 지면을 빌려 소개하면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 나는 침묵했다 /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중략) /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라는 내용의 시다.
  다만 소수라는 이유로 행해지는 차별과 폭력을 묵인한다면 우리가 소수가 됐을 때 어떠한 차별과 폭력이 나타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소수는 혐오 받아도 좋을 대상이 아니다. 아니, 혐오 받아도 좋을 대상은 없다. 적어도 인권이 바로 잡힌 사회라면 어떠한 경우에서도 혐오는 정당화될 수 없다.
  물론 혐오할 권리를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권리라는 것은 무제한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타인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침해하면서까지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다. 혐오감을 갖는 것은 개인의 감정이지 법적인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그 혐오감이 행동으로 나타났을 때, 그것은 엄연히 법에서 정하고 있는 명백한 범죄이다. 따라서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침해해가며 그들을 혐오할 권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여자는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지니지 못했다. 흑인은 사람대접 조차 못 받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남녀의 권리는 동등해졌고, 노예제도 역시 없어졌다. 그래도 좋을 취급을 받을 집단은 없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했다. 그리고 이제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이 사라질 차례다.
  다시 돌아가서,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성소수자를 흔히 ‘벽장 속에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쩌면 벽장 안에 갇혀있는 것은 성소수자가 아닌 편견에 사로잡힌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이들일 수 있다. 그 편견을 깨고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글 / 사진 곽효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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