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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등장한 지 20년이 되었다. 이제는 당연한 듯 그 말에 다들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정작 무엇이 위기인지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위기의 원인 진단도 다양하다 보니 해법도 다양하다. 도대체 최근 20년 사이 인문학과 인문대학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인문학의 위기는 한국적이고 정책적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전세계적인 현상인가? 아니면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인가? 학문 자체가 문제인가, 아니면 정책실패의 산물인가? 1995년 학부제, 1998년 모집단위 광역화 정책의 시행과 인문학의 위기는 궤를 같이 한다. 학부제가 되면서 인문학 내에서 극히 일부 전공에 학생이 편중되었고, 대다수의 인문학 전공은 학생이 없어 통·폐합을 강요받게 되었으니 이것이 인문학 위기의 시초이다.
   학생들이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몰린 전공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일정부분 교육의 부실이 끼어들 수밖에 없었고, 비인기 전공은 정작 해야 할 일 보다는 학생들의 이목을 끌어 한 명이라도 학생을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었다. 외국어문학 전공자들이 갑자기 각자의 전공은 뒷전에 두고 지역학 깃발을 들고 우왕좌왕하던 시기가 이 시기이다.
   이 시기는 또한 역사와 철학을 포함한 전통 인문학 전공이 사회와의 소통이 부족했음을 반성하고, 강의실에만 갇혀 있던 인문학 강의를 강의실 밖으로 끌어 내 사회의 문제에 접목하려는 노력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최근 열풍이 불고 있는 강연 인문학의 씨앗도 사실 이 시기에 뿌려졌다고 할 수 있다.
   위의 논지에 동의한다면, 인문학의 위기는 한국적인 현상이며 인문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위기가 아니라 대학 내에서의 인문학 전공 편중이 몰고 온 위기이고 이러한 편중현상은 학부제와 모집단위 광역화 정책의 실패에 기인한다는 점도 동의할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대학·사회의 위기
   대학에서 인문학이 죽어가고 있는 이유는 유한한 대학의 자원을 선택과 집중 원칙으로 투입하는 과정에서 인문학이 밀리기 때문이다. 학령인구감소, 대학구조개혁, 학과 통·폐합에서 인문학은 자유롭지 못 할뿐더러 특히 사립대는 인문학과가 통폐합 대상 영순위가 되고 있다. 교수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2014학년도 행해진 폐과의 29.9%가 인문계열 학과이고, 그 중에서 수도권 대학에서는 없앤 학과 중 인문계열 학과가 38.5%를, 지방대의 경우 24.7%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리탐구의 장인 대학에서 인문학이 외면 받고 있는 현실이 곧 대학의 위기요 사회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 고유의 정신 함양과 전인적 교육을 지향하는 인문학의 발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지금이라도 대학과 사회 그리고 당국이 함께해야 할 때다. 교육부가 지난 1월 말 2015년 업무계획을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항목은 올해 상반기 중으로 ‘인문학 진흥 종합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부분이다. 이 글에서는 대학에서의 인문학 진흥 방안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인문학을 인문학답도록 지원해야 한다. 
   인문학 각 전공이 학술 연구와 교육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학문 후속세대가 끊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인문학 진흥에는 취업이라는 잣대 보다는 대학원 진학자 비율 등이 더 적합한 잣대라고 보인다. 비유컨대, 육상 선수를 야구의 투수처럼 공을 못 던진다고 탓할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제일가는 육상 선수가 되도록 국가가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문학이 기초학문으로서 제대로 발전해 나가야만 ‘대학다운 대학’이 될 수 있고 나아가서 학문 전체의 균형적인 발전도 기대해 볼 수 있다.

   둘째, 지속적인 인적 투자를 해야 한다.
   유구한 학문적 전통에서 인문대학은 대학 중의 대학으로 자긍심이 높았다. 그러나 최근 대학 사회에서 인문대학의 위상은 심각하게 추락해 왔다. 무엇보다 교수가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 가슴 아프다. 이러한 참담한 현실은 수치로도 바로 증명이 된다.
   충남대학교의 경우 전체 교수 배정정원은 2008년 897명, 2014년에는 919명으로 22명이 늘었지만, 인문대학 12개 학과 교수 수는 2008년 91명에서 2014년 77명으로 줄었다. 불과 6년 사이에 14명의 교수가 사라졌다. 인문학 교수의 수를 줄이는 일은 나무의 뿌리를 잘라 버리는 일이며,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또한, 학문 후속세대가 연구만으로도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인문학 진흥의 요체가 되어야 한다. 독일의 특별연구분야(Sonderforschungsbereich, SFB) 지원체계를 벤치마킹하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셋째, 취업률 대신 기초학문 투자비율을 평가하자. 
   대학이 학생들을 잘 가르쳐서 사회의 적재적소에서 동량으로서 활동하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 좋은 인재를 길러내야 할 의무가 대학에 있는 것도 맞다. 대학도 졸업생의 취업에 신경을 써야 하고 그래 왔다. 그러나 취업률로 학문이나 대학을 평가하는 일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더구나 인문학과 같은 순수학문에는 말할 필요도 없다.
   취업이 안 되는 것이 대학의 책임이라면 대학이 잘 가르치면 나라의 일자리가 늘어나야 할 터인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대학에 들이미는 취업률 압박은 제로섬 게임에 불과하다. 근본적으로 파이를 키우는 일, 즉 일자리 창출은 국가의 책임이다. 대학이 일자리 창출 기관이 아닌 바에야 취업률은 ‘프로쿠르테스의 침대’와 같은 것으로 대학의 평가 잣대이어서는 안 된다.
   평가지표는 평가대상이 나아갈 지향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대학의 발전 방향을 고려하여 설정해야 한다. 인문학 발전을 위해서는 긴 안목의 집중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기초학문분야 투자비율’과 같은 지표를 개발해 대학이 대학다운 모습이 되도록 스스로 노력하고 있는지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넷째, 다양한 평가 지표의 개발로 국립대와 사립대, 대규모 대학과 중소규모 대학, 수도권과 지역대학 등 다양한 요건에 맞는 지향점을 제시하고 제도적으로 유도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문대학의 95%가 사립이고, 4년제 대학의 경우에는 75%가 사립이다. 우리나라의 고등교육정책이 헛도는 이면에는 과도한 사립대학의 비율에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또한 국가의 고등교육에 대한 책임 방기라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모든 대학이 모든 전공을 다 운영할 필요성이 있는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특히, 사립대학과 국립대학의 역할과 기능 분담을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 된 것으로 보인다.
   재단에 의해 운영되어 시장논리에 민감한 사립대학과는 달리, 시장논리에 영향 받지 않고 국가의 재정지원 속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수 있는 국·공립대학교는 국가에서 관심을 가지고 집중 지원을 해야 한다. 국·공립대학교의 비중이 25%가 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더더욱 국·공립대학교의 인문대학에 투자가 필요하다고 보인다. 국공립대학교에서마저 인문학에 투자를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인문학 교육과 연구는 심각하게 빠르게 황폐화될 것으로 우려된다.

   다섯째, 장기적으로 학부 인문학 전공자의 정원을 줄이고 대학원 육성에 힘쓸 것을 제안한다. 
   사회적 인력수급의 불균형 문제는 정책적 수요 예측 실패의 문제이므로 입학자원의 감소 및 일자리 수요와 연동하여 정원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다만, 입학정원 축소는 교수들의 책임시수 축소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장기적으로,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들처럼, 인문학 교수들의 책임시수를 6학점으로 줄이고 연구에 집중하도록 하는 법적인 뒷받침을 할 것을 제안한다.

   인간에 대한 학문적 탐구의 총체를 일컫는 인문학은 모든 학문의 뿌리다. 인문학은 곧 인간학이요 순수학문이고 기초학문이다. 인문학의 홀대는 세월호 사태에서 배울 수 있었던 평형수의 중요성을 망각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 말이 무서운 경고로 들린다면, 혹시 지금까지 인문학을 홀대해 왔기 때문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류병래 인문대학장, 언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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