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년째 멈춰져 있는 산내에 가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극 중 영신(이은주 분)이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는다. “보리쌀 준다길래 이름만 썼지 난 보도연맹이 뭔지도 몰라”라고 말하는 그녀처럼 6·25전쟁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이념 대립 속에서 무참히 죽어갔다.
  이곳 대전에도 보도연맹관련 학살이 있었다. 대전 산내 골령골(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 13번지)에서 일어난 대전산내학살사건은 6ㆍ25 전쟁 때 북측이 남진하자 대전 형무소에 수감된 보도연맹관련 민간인과 정치사범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이다. 기자가 직접 현장에 가 보았다.

 

1. 대전 산내 골령골 골짜기로 들어가는 길.
2. 희생자의 피가 개울을 타고 흘러 산내학살 당시 이 개울에서 며칠 동안 붉은 핏물이 흘렀다고 한다.
 3. 대전산내사건유족회에서 6·25 발발 50주년을 기리며 세운 비석. 비석에 돌로 찍은 자국이 선명하다.


    대전산내학살과 유가족 이야기
   대전 산내 학살터는 가을볕을 받아 한창 따사로웠다.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던 학살지의 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산내 초등학교를 지나 외곽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교회가 보인다. 교회에서 얼마 못 가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에서 6·25 발발 50주년을 기리며 세운 비석이 있다. 몇몇 사람들이 돌로 비석을 찍어 곳곳에 돌자국이 나 있다. 비석 뒤에는 발견했지만 미처 수습하지 못한 유골들을 항아리에 담아 묻어 놨다.
   교회 앞에는 이곳이 산내학살터임을 알리는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교회를 시작으로 골짜기로 이어지는 구 도로가 나 있고, 구 도로와 구 도로 오른쪽으로 나 있는 신 도로 사이에는 개울이 흐른다. 희생자의 피가 개울을 타고 흘러 산내학살 당시 이 개울에서 며칠 동안 붉은 핏물이 흘렀다고 한다. 구 도로 왼쪽에는 밭들이 있다. 밭 아래에는 아직도 수많은 희생자들의 유골들이 묻혀 있다. 어느 골짜기라고 할 것 없이 곳 산내 골령골 전체가 학살터다. 동행한 모소영 대전산내사건유족회 사무국장은 “예전에 이곳에서 산내학살에 대해 알리는 설명회를 했었는데 그 때는 유골이 발에 툭툭 채일 정도였다”고 말했다. 지금은 길을 다닐 때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밭을 갈 때마다 쟁기에 유골이 걸려 나온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7년 유해 발굴 당시 40여구의 유골밖에 찾지 못한 것은, 토지 소유주와 합의가 안 돼 발굴을 못 한 부분도 많지만 유골이 도자기 만드는 곳에 쓰이고 나병 환자에게 좋다는 속설이 있어 지난 30년간 사람들이 유골을 캐서 팔았기 때문이라는 믿기 힘든 이야기도 있다.
   대전산내사건유족회 김종현 회장의 아버지와 문양자 이사의 아버지는 그들이 각각 13살, 6살 때, 대전 산내에서 돌아가셨다. 그들은 그나마 세상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김 회장은 “옛날 공무원들은 우리를 빨갱이라고 하면서 쳐다도 안 봤다. 국가기관에서 진실규명을 해서 지금은 이야기라도 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우리 아버지가 빨갱이라고 해서 아버지에 대한 말을 일절 못 했다”며 “아버지가 대전 산내에서 돌아가셨다는 것만 알고 지나다닐 때 마다 자식으로서 상도 못 치렀다는 미안함에 고개만 숙였었다. 예전에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곳이 골령골에서 한참 올라간 곳인 줄 알았는데, 2000년도에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를 통해 골령골이 학살지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문 이사는 “문민정부 전까지는 연좌제에 걸려서 공무원도 못 하고, 대기업에 취직도 못 했다. 우리 아들까지도 외국에 못 나갈 정도였다”며 “주변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쉬쉬해 아버지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도 없이 빨갱이 자식 취급만 받았었다”고 말했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들 하지만, 아직도 산내학살사건은 유가족들의 꼬리표가 되어 그들을 두렵게 한다. 김 회장은 “대한민국은 기득권 세력이 갖는 나라”라며 “전국적으로 100만 명 정도가 학살된 것으로 추산된다고 하는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 규명한 것은 8000건 밖에 되지 않는다. 4.19 혁명 후 유족회 간부들이 전부 징역을 가고, 간첩으로 몰려 죽은 것처럼 혹시 정부가 바뀌면 불이익이 있을까 싶어 신고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도 지금은 이렇게 말 할 수 있지만, 2000년대 초반에는 적극적으로 앞에 나가지를 못했었다. 그렇게 정신적인 고통을 어마어마하게 받았다”고 말했다.
   ‘빨갱이 자식’으로 낙인찍힌 가족들은 사회적인 비난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힘들게 살아야 했다. 김 회장은 “지금은 유족회 활동을 하면서 아버지께서 민족주의자였고, 애국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옛날에는 아버지가 정말로 원망스러웠다. 아무것도 못 하고 빨갱이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용기를 가질 수 없었고 점점 폐인이 되어 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 죽으면서 그 가정은 산산 조각났다. 자식은 고아로, 부인은 일부종사라 해서 평생 과부로 살아야 했다”며 한 사람의 희생이 그곳에만 그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4. 산내학살터임을 알리는 유일한 표지판. 동구청에서 표지판 건립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유족회 자비로 표지판을 세웠다.


   안내판 설치, 유해 보존·발굴 난항
   타 보도연맹관련 학살 지역과는 달리 사건이 일어난 지 64년이 지난 지금도 제대로 된 유해발굴사업을 해 보기는커녕 아무런 조치 없이 방치되고 있다. 2007년 처음으로 대전산내사건 유해발굴을 시작했지만,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가 해체되면서 중단된 상태고 일부 학살터는 토지소유주와 합의가 안 돼 유해 발굴 시도조차 해 보지 못했다. 지금은 산내학살터에는 무허가 건물과 밭들이 자리해 있다. 김 회장은 “개인이 사유지를 매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유족들은 어찌 할 도리가 없다”며 “결자해지라고 국가에서 해결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대전시가 타 지역에 비해 소극적인 대안을 내놓고 있다고 비판한다. 현재 대전시가 지원하는 대책으로는 위령제 지원비로 280만원을 지급하는 것이 전부다. 김 회장은 “현재 대전시의 지원비는 너무 적다”며 “대전산내사건유족회의 경우 위령제를 지낼 때 돈이 1000만 원 이상이 든다. 나머지 돈은 유족회 자비로 충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진실화해위원회 심규상 전 자문위원은 “대전 산내는 남한의 6ㆍ25관련 최대 8000명에 이르는 민간인 희생자 희생지역이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유가족 수천 명을 찾아낼 의무가 있는 지역인데, 대전시는 위령제 지원에 있어서 희생자 규모와 유가족의 수를 고려하지 않고 타 지역과 비교한다. 경기도나 거제, 진주, 거창 등 크고 작은 곳에서도 지원을 하는 반면 대전시는 조례를 만들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진실화해위원회 심규상 전 자문위원은 “타 지역과는 다르게 사건에 대한 자료집이나 백서발간이 없고, 유해발굴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며 “대전 산내가 갖는 규모, 사회 정치적 의미,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대책”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 13일, 대전산내사건유족회는 대전광역시 안전행정국에 ▲산내희생사건 조사 연구 및 백서발간지원 ▲위령제 지원비 현실화 ▲지원 조례제정 ▲유해훼손 방지를 위한 긴급 현장 안내판 설치사업 등을 요구한 상태이고, 대전시 행정자치국장과 오는 6일 면담을 할 계획이다. 대전시 안전행정국 자치행정과는 현재 요청서를 검토 중이다.

 

5. 대전산내유족회에서는 2000년부터 매년 6월 27일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사진제공. 대전산내사건유족회]
6. 비석 뒤에 미처 수습하지 못한 유골들을 항아리에 담아 묻어 놨다. 유해 발굴이 시급하지만 진전이 없는 상태다.


   기약 없는 후속대책
   2005년에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는 일제 강점기부터 제6공화국까지의 과거사를 조사하여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돕고, 가해자에게는 감형 등 법적ㆍ정치적 화해 조처를 건의하는 국가기구로서 보도연맹사건 진실 규명에 힘써 왔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10년 진실규명결정서를 통해 한국전쟁당시 최소 1800여명 이상의 보도연맹원과 재소자 등이 헌병대와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없이 산내 골령골에서 집단 살해됐다고 발표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를 국가에 의해 자행된 명백한 불법 행위로 규정하고, 국가의 공식사과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위령사업 지원, 재발 방지를 위한 전쟁 및 비상사태 시 민간인 보호조치 규정 정비 등을 권고했으나 4년 째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재 진실화해위원회는 2010년 활동을 끝으로 해체된 상태이며, 그 기능을 대신하는 단체는 없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사라지면서 빛을 보는 듯 하던 산내학살사건은 다시 빛을 잃고 말았다. 김종현 회장은 “진실화해위원회 해체 후 후속대책들이 멈추어버리면서 사장되었다. 현 정부는 자꾸 이 일을 덮으려 한다. 잘못된 일이니 안 된다는 이야기는 절대 안 하고, 실천으로 옮기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또한 모소영 사무국장은 “유해발굴이 전혀 안 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정부차원에서 제2차 진실화해위원회가 꾸려지거나 시나 지자체에서 도와주지 않는 한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심규상 전 자문위원은 “유족회에서는 진실화해위원회가 해체되고 아무 일도 못 하고 있으니 특별법을 제정해서 진상규명위원회를 출범시켜 못 다한 후속사업을 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며 “국회에 특별법이 올라가 있는데 계속 계류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산내학살터에 국가에서 허가받은 정식 안내판을 세우고 내년 위령제는 그 안내판 밑에서라도 지내고자 하는 작은 소망이 있다고 전했다. 추모 공원에 세울 위령탑도 작가에게 설계를 맡긴 상태다. 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유족회는 희생자들을 기리며 희망을 가지고 차근차근 준비 중이다. 64년째 끝나지 못한 산내학살사건이 이제는 마무리되기를 바란다.


글 / 최유림 기자 hahayoorim@cnu.ac.kr
사진 / 충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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