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질 들뢰즈(왼쪽), 자끄 데리다(가운데)/ 사진출처. blog.naver.PostList.nhn, Google

‘차이는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 있다. 그러나 차이의 배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 - 질 들뢰즈

   “저기 검둥이 좀 봐. 검둥이가 떨고 있지. 검둥이가 떨고 있는 것은 춥기 때문이다. 아이가 떨고 있는 것은 검둥이가 무섭기 때문이고. 검둥이는 추위 때문에 떨고 있다. 그 잘 생긴 꼬마도 떨고 있었다. 그것은 그 아이가 검둥이가 떨고 있는 것이 분노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 아이는 엄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엄마, 저 검둥이가 날 잡아먹으려 해요.”
   탈식민주의의 고전으로 평가되는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1925 ~1961)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1952)에 인용되어 있는 백인여자와 그 아들의 대화이다. 백인 소년의 흑인에 대한 반응은 흑인에 대한 차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두려움과 공포 혹은 편견의 대상이 된다. 즉, ‘나’와 동일한 문법을 공유하지 않는 ‘타자’는 주체의 동일성을 위협하는 대상이다. 이러한 대립구도는 ‘보편적 가치’에 의해 이질적 차이를 폭력적으로 우리 안에서 배제한다. 이질성에서 생긴 차이를 무시하고 획일적인 기준으로 이를 동일화시키려는 동일자의 논리에 의해 타자는 차별적인 폭력으로 상처받는 존재들일 뿐이다.
   바로 이와 같은 ‘차이’에 대한 적대적인 반감은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테러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 우리들이 인간을, 사회를,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극명한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편협한 인식에 현대인들이 포획된 것은 무엇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일까?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 ~1995)는 이것을 우리의 ‘표상’ 체계의 오류 탓이라고 했고,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 ~2004)는 대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경직적이고 일면적인 사고방식이라 하였다. 곧 “나는 너와 달라”라는, 이 세상을 개념적으로만 파악하려는 ‘절름발이식’의 왜곡되고 조작된 사유방식이다.
   ‘개념’이란 인간이 어떤 대상의 존재를 분류하고 체계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으로 강아지, 책, 휴대폰과 같은 것이다. 생물학에서 지금도 사용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차’개념은 가령 호랑이나 사자라는 하위개념인 ‘종(種)’이 다른 종과 다른 차이에 대해 말하지만, 그 차이는 고양이과라는 상위의 동일한 ‘유(類)’개념 안에서의 차이에 불과하다. 이는 호랑이와 고양이의 차이를 상위의 ‘유’개념, 즉 동일성에 기초해서 이해하려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호랑이나 사자는 고양이라는 동일성, 즉 세상의 대상들을 구분하는 머릿속의 기준인 ‘표상’에 비추어서 이런 게 없고 저런 게 있다는 식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호랑이가 고양이로 환원될 수 있는 것만으로 구성되어 있진 않다. 가령 길거리에 어슬렁거리는 호랑이를 보고 고양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일단 고양이보다 무섭기 때문에 주는 영향 자체가 다르다. 따라서 우리는 호랑이가 인간이 모르는 무수한 성질과 특이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개념과 호랑이라는 동물 그 자체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가 고작 개념이라 부르며 아는 것처럼 말은 하지만 결코 우리는 완전하게 어떤 대상을 인식하거나 지각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개념으로만은 대상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없는 것이며 이 드러낼 수 없는 그 자체의 차이를 들뢰즈는 ‘차이 자체’라고 표현했다. 즉 이 세상 존재 모두가 다 다르다는 말이다. 
 


대상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없는 ‘차이 자체’

‘차이’를 받아들여 다른 색깔들이 모인 하나의 교향곡을 연주해야

   동일성 외에도 차이는 대립에 기초해서 또한 사유되어 왔다. 요컨대 남성/여성, 이성/비이성, 정상과 비정상 등의 이항대립적 관점으로 나누고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경계를 설정한 후에 양자에 대해 좋고 나쁨의 가치를 평가하고 대입한 것이다. 예를 들어 각각이 무수한 차이가 있는 abcde를 abc는 A, de는 ­A라는 하나의 동일성으로 묶어버린 꼴이다. 그러나 세계를 이러한 방식으로 보는 것은 삶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타자를 어떤 집합적인 속성으로 환원해 버리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만이 존재하는 공간에 ‘남성적 여성’, ‘여성적 남성’이 설 자리는 없다. 벌건 대낮에 길가에서 담배를 피는 초등학생을 목도했다고, 그 아이를 일방적으로 ‘불량학생’이라는 집합적 틀 안에 집어 넣어 그 아이는 공부도 못 하고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고 술도 마시며 온갖 청소년범죄의 온상일 것이라는 식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실제 그 아이는 천성이 착함에도 불구하고 담배 외에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 놓인 아이인지도 모른다. 어떤 여자가 노출이 심한 옷을 입었다고 해서 그녀를 천박한 여자로 평가해버린다든가, 특정 취미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몰고 가는 경우는 흔한 예시일 수 있다. 아직도 강대국 중심의 세계화와 자본의 논리에서 여전히 주체성을 확립해야 할 탈식민의 과제를 안고 있는 한국이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억압과 착취를 일삼는 ‘하위제국’의 모습을 보이는 세상은 빈곤하다. 그러한 한국인이 이들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는 서구인이 17, 18세기에 흑인들 대하는 태도와 비슷하다. 민족주의란 동일자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끔찍한 배타주의다.
   들뢰즈는 ‘차이’에 주목함으로써 동일성과 대립 등의 거대한 그늘에 가려 있던 수많은 차이를 긍정적인 힘으로 끌어낸다. 달라도, 혹은 싫어도 참고 견디겠다는 말뿐인 ‘관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교향곡이 연주할 때마다 다른 색깔을 내듯이 우리 삶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끊임없는 반복이라는 것이며, 이를 통해 낡은 삶의 방식에서 벗어난 탈주선을 그리는 새로운 가치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차이를 동일성에 기초하지 않고 그 자체로 보는 것, 미세한 차이들을 감식하고 알아낼 줄 아는 능력은 세상을 더 풍요롭게 한다. 존 싱글턴 감독의 영화 <하이어 러닝>(1995)은 대학 생활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고립된 한 백인 학생이 자신과 같은 흰 피부에 금발머리, 푸른 눈을 가진 스킨헤드족 모임에 포섭되면서 다른 학생들을 일반적인 악(惡)으로 규정하며 총기를 난사한다. 차이를 다름으로 인정하지 않고 서열화해 차별한 결과였다. 


최영 대학원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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