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sleepora.com/sleepblog. awiderbridge.org.

   인간 중심의 사고를 깨고 인류에게 치유할 수 없는 모욕을 가한 3대 발견이 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전통적 우주관을 포기하게 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인간이 신의 창조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특권을 앗아 간 ‘다윈의 진화론’, 그리고 인간이 합리적 사고를 하는 이성적 주체가 아닌, 예측 불가한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존재일 뿐이라는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이 그것이다. 가히 혁명이라 할만한 이들 발견으로 인해 인간은 그때까지와 전혀 다른 관점으로 스스로를 보게 되었다. 이 중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오스트리아의 신경학자이자 정신분석의 창시자로 20세기 사상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거대한 빙산의 일각이며, 인간의 깊은 내부에는 무한한 무의식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어 그것이 인간의 의식세계를 지배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행동양식의 모든 일면에는 무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이드(id)는 본능적 충동에 해당하고, 자아(ego)는 이드의 충동을 억제하면서 이드와 초자아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며, 초자아(superego)는 이드에 반해서 양심과 이상으로 나아가려는 기능을 갖는다. 여기서 이드는 무의식에 가깝고, 자아는 의식에 근접한다.
   자아는 우리가 대부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 정도의 방어기제들을 사용하고 있다. 인간은 마음의 평정을 원하지만 이를 깨트리는 사건들이 외적, 내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못하는 성적 충동, 공격적 욕구, 미움, 원한 등은 하나의 위험으로 인식돼 불안을 일으킨다. 이 불안은 본능적 욕구인 이드에 대항하는 도덕적 초자아의 위협이 원인이다. 이 때 자아는 불안을 처리하여 마음의 평정을 회복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를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라고 한다. 이 방어기제들을 사용하는 과정 중에 성격상의 특성이 형성되고 이는 다시 사고방식 및 행동양식으로 드러나게 된다.
   ‘막장드라마’의 상투적인 장면들을 상상해 보자. 10년도 넘게 사귄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은 그녀는 비가 쏟아지는 도로를 과속하며 달리고 있다. 그리고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함께 장면은 전환되어 병원에서 눈을 가늘게 뜨며 깨어난 그녀,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전 남자친구를 기억하지 못한다. “누구세요?” 막장드라마를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기억상실증은 마음의 상처를 예방하기 위해서 일종의 방어막이 형성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의 방어가 허술했다면 갑작스런 고통과 충격으로 마음의 통제력을 상실해 신경증 등과 같은 정신장애가 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의식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고통스럽고 충격적이어서 무의식 속으로 억눌러 버리는 방어기제를 억압(Repression)이라 한다. 억압은 자아를 위기상황으로 빠트릴 수 있는 대상물과 욕구를 눌러서 의식 밖으로 쫓아내는데, 다시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까지 억압된 것은 잊혀진다.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라는 사고를 산산조각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무의식 중 마음의 움직임 내밀한 의식이 변형된 표현일 수도


   또한 승화(Sublimation)는 억압된 욕구 에너지가 방향을 온전히 바꾸어서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형태와 방법을 통해 대상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방어기제이다. 예를 들면, 공격욕구를 직접적으로 발산시키는 대신에 스포츠 기록에 도전하는 것, 성적 욕구를 직접 발산하는 대신에 문학작품의 창작에 전념하는 것도 승화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토록 큰 관심을 기울여서 그린 마돈나는 다 빈치가 어린 시절에 작별한 모친을 그리워하는 정신 에너지가 승화된 것이라 한다. 이 밖에도 무의식적 충동과 정반대의 것을 표현하고 행동하는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 초기의 발달단계나 행동양식으로 후퇴하는 퇴행(Regression), 부모님께 꾸중 들은 아이가 동생에게 화를 내거나 지나가던 강아지 궁둥이를 걷어차는 행위처럼 욕구충족 대상에 접근할 수 없을 때 다른 대상에게 에너지를 돌리는 전치(Displacement) 등이 있다.
   무의식 중에 작용하는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메커니즘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는 이뿐만이 아니다. 무의식은 의식과는 분리된 다른 영역에 존재하는 정신작용이지만 동시에 의식을 거치지 않고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의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무의식이 존재하는지 조차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의 검열 작용은 무의식이 직접적으로 의식으로 유입되는 것을 억압한다. 따라서 무의식적 욕망은 꿈, 말실수, 농담 등과 같은 위장 수단을 통해 검열을 통과한다. 이러한 사례로 최근 모 방송국 보도국장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 “300명이 한꺼번에 죽어서 많아 보이지만 연간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수를 생각하면 그리 많은 건 아니다”라는 발언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경우를 들 수 있다. 보도국장은 왜곡되었다고 말하면서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을 갖게 된다. 의식 주체가 자기도 모르게 실수했다면 그 실수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본의 아닌 말이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것은 본의 아닌 것을 말하게 하는 어떤 심리 기제가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 될 수도 있다. 또 의식 주체는 부적절한 실수라고 말하지만 그 실수야말로 오히려 발화자가 공개적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밀한 의식의 변형된 표현은 아닐까? 보도국장은 그 말실수를 통해 세월호 사건을 ‘개별 교통사고로 희석시켜 정부의 책임을 묻지 않게 하려는’ 정치적 본의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실언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발화자 자신의 숨겨진 마음이 드러난 진담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의식으로 억압된 욕망일지라도 언제든지 충족의 기회가 있으면 말실수와 같은 변형된 형태로 끊임없이 의식계로 떠오를 수 있는 것, 이를 프로이트는 ‘억압된 것의 회귀’라 했다.
   바야흐로 우리는 정신분석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철학·예술·문화이론·사회이론 등 인문학 분야는 물론 심리학·정신의학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분야에서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학문분야는 거의 없다. 인간이 우주, 동물, 무의식과 구별되는 특권적 지위를 가졌다는 당시의 생각들이 무의미해져 버린 지금, 우리들의 오만한 자존심에 상처를 가할 네 번째 충격은 어디에서 일어날지 자못 궁금하다.

최영 대학원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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