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도 ‘파놉티콘’은 존재한다

 

   21세기에 억압을 이야기한다? 모 대기업 부회장도 스펙이 아닌 인문학이 인생을 더 풍요롭고 향기롭게 해준다고 스티븐 잡스 흉내를 내는 이 시대에 말이다. 혹시 헷갈릴 이들을 위해, 다른 곳을 짚고 이미 입술을 이죽대고 있을 이들을 위해, 에질러 못 박고 넘어갈 이야기가 있다. 남들보다 더 잘살기 위해 바쁜 이 사회에서, 이제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어 지배 없이도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이러한 노동사회에도 억압은 존재한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저작 『감시와 처벌』 서문에서 프랑스 절대군주 시대 범죄자들의 억압적 처벌이 매우 잔인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진술한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국왕 시해를 기도한 다미앵에 대해 내려진 ‘자비로운 형벌’은 다음과 같다.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하고…,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을 녹인 것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버린다.” 푸코가 ‘신체형’으로 부른 이러한 처벌 방식은 본질적으로 범죄자의 신체에 물리적 폭력을 가함으로써 군주 권력의 위엄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절대적 복종의 심리를 창출하는 정치적 과정이다. 그런데 18세기 후반에 이러한 신체형에 대한 거부가 공론화되면서 범죄자의 물리적 처벌 그 자체로부터 범죄자의 교화 및 범행의 예방이라는 형벌에 대한 합리주의적 접근이 반영되어 궁극적으로 감옥이라는 새로운 제도의 탄생으로 귀결된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신체형으로부터 감옥으로의 형벌 제도의 변화는 인간과 사회를 합리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규율 사회의 건설이라는 거대 프로젝트의 한 부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근대적인 형벌제도의 탄생과 함께 학교, 병원, 군대, 정신병요양원, 공장 등 주요 사회 기관들에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신체에 관한 과학적인 관리법이 적용되어 예속적이고 복종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려는 움직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이 설계한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감금 시설은 규율 사회 작동 원리의 핵심적 측면들을 잘 보여준다. 파놉티콘은 바깥으로 원주를 따라서 죄수를 가두는 방이 있고 중앙에는 죄수를 감시하기 위한 원형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죄수의 방은 항상 밝게 유지되고 중앙의 감시탑은 항상 어둡게 유지되어, 중앙의 감시탑에 있는 간수는 죄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감시할 수 있지만 죄수는 간수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없는 구조이다. 파놉티콘에 수용된 죄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상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간수의 시선 대문에 규율을 벗어나는 행동을 못하다가 점차 이 규율을 내면화해서 스스로 자신을 감시하게 된다는 것이 벤담의 생각이었다. 푸코는 여기에서 나아가 사회에 존재하는 기관, 즉 군대, 학교, 병원, 공장 등에도 감옥과 닮은 파놉티콘의 형태가 존재해 꽉 짜인 일과를 통해 인간의 정신을 억압하고 훈육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며, 감시자는 이제 피감시자의 내부에 들어와 강제나 무력이 아니라 피감시자들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규율-예를 들면, 운전자가 아무도 없는 새벽에 정차 신호를 받고 횡단보도 앞에 차를 멈추고 서 있는 일(경찰의 수나 CCTV설치비를 줄일 수 있게 된다)-을 통해 통치의 주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감시하는 벤담의 ‘파놉티콘’

정보로 통제되는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이러한 ‘규율 권력’은 지구화와 디지털 데이터베이스가 맞물려 완성되어 가는 오늘날 보다 진화되고 교묘한 형태로 세세하면서도 은밀하게 우리를 억압하고 감시한다. 더 이상 파놉티콘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시선의 권력에 의해 움직이는 감시카메라와 같은 구글과 소셜 네크워크 서비스가 남보다 더 잘살기 위해, 더 사적인 즐거움에서 출발해 이용한 곳에서 디지털 파놉티콘 체계를 완성해 가고 있다. 파놉티콘에 갇힌 죄수가 자신이 감시를 당하는지 아닌지를 모르듯이, 디지털 파놉티콘의 정보망에 노출된 사람들 또한 자신의 행동이 국가나 직장의 상관에게 열람될지 않을지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나 작업에 주의를 기울이곤 한다. 이제 우리는 전자 메일과 포털 사이트를 무료로 사용하기 위해 혹은 기업과 신용카드 회사가 제공하는 경품이나 할인을 받기 위해 순순히 정보를 준 이력으로 숫자와 코드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를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서울대 생명과학부 홍성욱 교수는 벤담의 파놉티콘과 디지털 파놉티콘 사이에는 역(逆)감시가 가능하다는 질적인 차이를 주시한다. 노르웨이의 범죄학자 매티슨은 다수가 소수의 권력자를 감시하는 언론의 발달을 시놉티콘(Synopticon)으로 명명하였는데, 이는 인터넷과 같은 다 대 다(多 對 多) 소통이 가능해지면서 역감시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동일한 기술이, 권력이 우리를 감시하는 데에도, 역으로 우리가 권력을 감시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다. 그런만큼 역감시는, 가능하지만,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후기 근대사회의 우리는 의무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복종, 법, 의무 이행이 아니라 자유, 쾌락, 선호가 그 원칙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도 지구적 하위주체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삶에 중층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권력의 억압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말해져야 한다.


최영 대학원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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