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인간, 대학생인 바로 나?

 
   2014년의 대한민국에서 젊은이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취업을 하더라도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출발하게 될 것이며, 비정규직 평균 월급 119만원 중 20대 급여의 평균 비율 74%를 곱하면 88만원. 그렇게 만들어 진 ‘88만원 세대’라는 말은 대입 전쟁에 등록금 전쟁까지 치르고도 취업이라는 거대한 장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위 ‘스펙 쌓기’에 열정을 바쳐야 하는 젊은 세대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용어를 만들어 낸 『88만원 세대』 책의 저자 우석훈은 “청춘들이 이 책을 움직이지 않을 이유로 삼게 되었다”고 표현하며 책을 절판시켰다. 경제적 압박으로 연애, 결혼, 출산의 세 가지를 포기하게 된다는 또 다른 표현 ‘삼포 세대’가 말해 주듯 오늘날의 젊음은 불안하고 부조리한 사회에 당당히 맞서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 패배적인 감성은 자조와 어우러져 ‘잉여 인간’이라는 말의 대중화로 옮겨 가게 되었다. 잉여가 뭐냐는 물음에 간단히 ‘너’라는 답변이 달린 걸 보고 웃은 적이 있다. 노력해도 바뀌기 어려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별 가치 없는 소일일 뿐, 딱히 무엇이 되고 싶지도, 무엇을 해야 한다는 진지함없이 빈둥대며 ‘잉여잉여한 잉여질’을 한다고 자신을 거리낌없이 희화화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는 기성세대가 적지 않겠지만 누군가는 이 단어에서 흐릿한 가능성을 보기도 한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잉여 인간은 젊은이들의 암울한 처지를 반영하는 88만원 세대 같은 기존 용어 보다 부정적이거나 자기 파멸적인 의미가 덜하고 오히려 자신에 대한 작은 애정이 담겨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사실 잉여 인간은 요즘 만들어 진 신조어가 아니다. 러시아 작가 투르게네프가 1850년에 발표한 소설 <잉여 인간의 일기>에서 처음 등장했지만 이 개념은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독창적인 운문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이 발표된 1820년대로 거슬러 가볼 수 있다. 귀족 출신으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주인공 오네긴은 도시의 반복되는 사교 생활에 권태를 느끼며 시골로 내려가 세제 개혁이나 저술 등 유의미한 활동을 해보려 한다. 그러나 뜻대로 이루지 못하고 더욱 침잠해진 그는 이웃의 순진한 처녀 타치아나가  보내는 사랑을 거부하고 결국 친구 렌스키를 살해하게 된다. 오네긴은 19세기 러시아의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비참한 현실 하에서 고통 받는 비범한 인텔리겐차의 비극을 나타낸다. 당시 러시아는 나폴레옹과의 ‘조국 전쟁’에서 승리한 후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알렉산드르 1세의 전제 정치로 인해 좌절되고, 지식인들 사이에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로 도피성 낭만주의가 대두되던 때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푸슈킨은 오네긴을 통해 높은 이상과 능력을 갖고 있지만 사회 기준에 부합하지 못해 현실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소외시킨 채 무력한 삶을 사는 잉여 인간의 전형을 만들어 낸 것이다. 

"절망과도 같은 현실에서 '잉여스러운 삶'을 살 뿐이어도, 
그 무언가에 쏟아 부을 열정만있다면, 아직까진 괜찮다"


   한편 잉여 인간은 이미 우리 문학사에서도 1958년 손창섭의 단편 소설 <잉여 인간>을 통해 등장한 전적이 있다. 이 작품은 치과 의사 서만기, 입만 열면 사회를 비판하지만 행동할 의욕은 없는 채익준,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천봉우라는 세 명의 등장 인물을 통해 전후 여러 유형의 인간들을 묘사한다. ‘비분강개파’로 묘사되는 채익준은 현실의 부조리에 분노하지만 타협하지 못하고 궁핍한 생활을 영위하며, 천봉우는 삶에 대한 의지 없이 비현실적인 ‘실의의 인간’으로, 모두 전쟁의 결과로 한국 사회가 만들어 낸 쓸모 없는 잉여 인간들이다. 나름의 능력으로 제 몫을 하고 있는 서만기도 사실 완벽하진 못한데 천봉우의 부유한 아내 소유 건물에 개업을 하며, 결국 그녀에게 돈을 융통해 익준 처의 장례를 치른다. 현실 앞에서 경제적으로 무력한 지식인의 단면인 셈이다.
   위의 두 작품이 그리는 잉여 인간은 각각 동기의 부재(오네긴)와 능력의 부재(채익준, 천봉우)라는 차이를 지니지만, 모두 암울한 현실에 대한 근본적 고민과 인간성에 대한 뿌리깊은 회의를 보여 주면서 동시에 현실 극복의 가능성을 모색하기도 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잠언과도 같은 시구로 더 잘 알려진 푸슈킨은 오네긴과는 반대로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타치아나를 통해 민중에 가까이 닿아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 충만한 인간상을 구현하며, 손창섭은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 준 인간 혐오에서 조금은 벗어나 힘든 상황에서도 친구들을 포용하고 해결해 가려는 서만기에게 선량한 시민의 모습을 투영함으로써 전후의 황폐함 속에서도 한줄기 희망을 그려 내고 있다.
   다시 2014년의 대한민국, 선택되지 못한 남아도는 인간들에게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프랑스 영화 <증오>의 첫 장면은 이런 대사로 시작한다. “50층에서 추락하는 남자가 아래로 떨어지는 동안 계속해서 중얼거려. 아직까진 괜찮아. 아직까진 괜찮아. 추락하는 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어떻게 착륙하느냐야.” 얼마 전 출간된 『잉여 사회』의 저자 최태섭은 꿈과 현실 중 무엇을 택해야 하냐는 질문에 “어차피 뭘 해도 망하니까 그냥 하고 싶은 것을 하라.” 고 답한다. 학자금 상환, 고용 불안, 치솟는 물가와 집 값 등 절망과도 같은 현실에서 ‘잉여스러운 삶’을 살 뿐이어도, 남들이 ‘잉여짓’이라 부르는 그 무언가에 쏟아 부을 열정만은 가지고 있다면, 아직까진 괜찮다. 중요한 건 착륙하는 바로 그 순간이니까.      

최영 대학원생 기자  now_and_he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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