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1)네이버 지식백과 벤자민 워프/ 2)kk1234ahg.egloos.com

   한 달 전 귀가길 풍경을 하나 묘사해 보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층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옆면에 ‘잡상인 출입금지’ 글귀가 큼지막하게 적힌 관리 사무소의 게시판 공고가 눈에 띤다. 이유 모를 낯뜨거움. 언어는 인간들의 의사소통 수단이기에 모든 인류가 사용하고 있지만 생존 수단으로 상행위를 도리없이 선택한 우리 사회 피라미드 밑의 상인들을 ‘잡상인’이라 몰아붙이듯 지칭하는 게 과연 올바른 일일까?

사람의 생각하는 방식이 말을 좌우하는가, 혹은 그 역으로 말이 생각을 좌우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모든 철학자나 언어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말과 정신의 밀접성을 적극적으로 강조한 이들은 많다. 언어 결정론이란 “우리의 사고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사용 가능해진 범주에 의해 그 형태가 결정된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모국어가 그어 놓은 선을 따라 자연과 세계를 인식한다”는 이론이다. 이는 흔히 ‘워프주의(Whorfianism)’라고도 불린다.

전직 화재 보험회사의 조사원이었던 워프는 화재 사건의 원인에 대한 수많은 자료를 분석하면서 주어진 사회에 적용되는 단어의 의미가 인간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그는 공장 화재의 원인을 조사하면서 근로자들의 행동을 관찰했다. 예컨대 ‘빈 석유 드럼통 (empty drum)’은 더 폭발하기 쉬운 가연성 가스가 들어 있기 때문에 ‘석유가 가득한 통 (full gas drum)’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그런데 근로자들은 빈 드럼통 주위에서는 조심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면서 석유로 가득 담긴 드럼통 주위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워프의 생각으로는 근로자들이 드럼통 외부에 써 있는 "비었다(empty)"라는 단어를 "안전하다", "위험하지 않다", "무해하다", "진공이다", "활성이 없다"라는 단어와 연관 짓기 때문이고, "가득 찼다"라는 단어는 "위험한 물질이 있다"라는 개념과 연관시키기 때문이었다. 언어가 사람들의 사고를 결정한 것이다.

현재 이처럼 강한 언어 결정론은 성립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언어가 우리의 사고 방식이나 내용 등에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역시 전면적으로 부인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오늘날엔 사피어-워프의 강한 가설을 ‘언어와 우리의 정신 구조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정도로 수정한 약한 가설이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운동은 도덕적으로 공정하게 타자의 이름을 부르자는 진보적인 언어 운동으로 ‘정치’라는 단어로 인해 정당이나 국회의원 등과 관련된 용어로 오해할 수 있지만 현실 정치와 전혀 관련이 없으며, 1970년대에 미국에서 여성주의자들이 남성 중심의 성차별적인 단어들을 중립적인 것들로 바꾸어 쓰자고 외치면서 출발했다. 결혼 여부에 따라 여성을 ‘Miss’와 ‘Mrs’로 구분해 부르지 말고 남성 통칭어 ‘Mr’와 수평적으로 여성 통칭어 ‘Ms’로 부르자는 그 첫출발 때문에 정치적 올바름을 여성주의 운동에 한정 지어 오해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40년의 역사가 실린 PC(Politically Correctness, 정치적 공정성) 운동은 성별뿐 아니라 인종ㆍ지역ㆍ장애ㆍ나이ㆍ문화ㆍ성적 지향, 나아가 환경ㆍ식민지 역사ㆍ동물 권리 등의 다양한 측면에서 차별과 편견과 증오가 실린 단어와 표현들을 보다 공정한 것들로 바꾸어 쓰자고 제안한다.

이처럼 다양한 주제와 배경에 따라 영어에 제안된 PC어를 살펴보자. 한때 남성을 가리키는 단어 ‘man’이 ‘인간’, ‘인류’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남녀 성을 모두 포함하는 총칭적인 기능을 가진다고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따져 보면, 여성을 가리키는 단어가 엄연히 있음에도 남성을 가리키는 단어를 남·여 총칭어로 사용한다는 것은 남성 우위 사고의 표출에 지나지 않는다. Policeman이 police officer로, fireman은 fire fighter로 바뀌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성찰의 결과였다.

한편, 제국주의와 관련하여 ‘동양의 신비로움’을 함의하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란 단어는 가장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표현 중 하나다. 전 콜럼비아대 교수이자 문학 이론가였던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이 온전히 그들의 시각에서 동양에 대해 만들어 낸 환상이자 편견으로, 서구인이 동양을 ‘정복해도 되는 열등한 타자’로 구분 지어 아시아 정복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미 만들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쪽으로는 정의와 공정성, 다른 한쪽으로는 다양성과 다문화가 중요해진 우리 사회에서도 이제는 정의롭고 바르게 말하기가 정말 필요해졌다. 영어권에서 ‘differently abled(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 ‘physically challenged(신체적인 결함에 도전하는 사람)’라는 표현이 대중화되었듯, 우리 나라에서도 불구자보다 장애인이 훨씬 익숙해졌으며, 애완동물 대신 반려동물이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부랑자보다 노숙자를, 식모 대신 가사 도우미를, 노인네가 아닌 어르신을 사용하는 것들이 바로 PC 운동의 일환이며, 늘어 가는 다문화 가족 2세를 ‘혼혈’, ‘잡종’, ‘하프 코리안’이라 비하하지 않는 것도 같은 갈래이다. 결국 다름과 다양성은 이 운동을 관통하는 중요 개념인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여러 나라에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더 확산되며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이 지나치면 운동이 급진적, 공격적으로 변하기 십상인데다 효용성과 이중 잣대의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체적 맥락이나 주제에 관계없이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표현이 나온다는 이유로 훌륭한 문학 작품들이 교과서에서 배제된다거나, 다원주의를 지향하기에 타 민족의 역사 기술을 할 때 부정적인 면을 외면해 결과적으로 왜곡된 역사 인식을 낳는 등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교과서의 정치적 올바름이 상식선을 뛰어넘어 심각한 부작용을 낳게 될 수 있다.

그러나 혐오와 차별을 둘러싼 말의 전쟁은 매일 벌어진다. ‘일베’로 대표되는 사회 현상은 인터넷 세상에서 쓰이는 언어가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배제하거나 모욕하는 무기가 됨을 적실히 보여주는 한 사례다. 좌빨, 개독, 짱깨, 수구꼴통 등의 잔혹한 말로 타인을 상처 입히는 사람들이 보는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기도 무섭다. 언어의 다양성은 별개의 세계를 구축하는 축복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사는 다문화 사회를 살아가며 나와 너를 올바르게 말하는 언어를 습득하고 이를 통해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최영 대학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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