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덥수룩한 머리에 트레이닝 복을 입고 캠퍼스를 활보하는 A학우는 올해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다. 평소 영화에 관심이 많은 A학우는 교내 영화동아리에 가입했다. 연말에 열리는 독립영화제에 출품할 영화를 만들기 위해 밤샘 촬영도 불사하고, 방학까지 반납했지만 영화를 만든다는 자체가 그저 행복하다. 그는 공부와 영화동아리를 병행하며 아르바이트까지 하다 보니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만큼 분주한 매일을 살고 있다.
   오늘도 역시 밤새 촬영한 영상을 편집하고 뻑뻑해진 눈을 문지르며 수업이 있는 건물로 들어서는데 그의 뒤로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린다. “거울도 안보고 사나봐. 난 저렇게 자기관리 엉망인 애들 보면 좀 한심해보여.” 그는 그 말을 듣고 엘리베이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자기관리가 엉망이라서 한심하다고? 도대체 내가 왜?’

   자기관리=외모관리?
   자기관리의 진정한 말뜻은 무엇일까. 포털사이트의 검색창에 자기관리라는 말을 검색하면 수없이 많은 연예기사들이 쏟아진다. 대부분 아무개 연예인이 철저한 자기관리로 체중을 감량했다거나 늙지 않는 방부제 외모의 소유자가 됐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자기관리는 결국 철저한 외모관리를 의미하는 것일까?
   자기관리(self-management)의 의미는 직역 그대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관리하는 것’이다. 자기관리의 영역과 기준은 굳이 자신의 외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 내면적 가치 등 무궁무진하다. 

   자기관리란 외모 가꾸기가 아닌 자기 자신을 스스로 관리하는 것

   가령 연예인은 TV와 스크린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신의 모습이 늘 대중에게 노출된다. 또한 대중의 관심과 사랑은 그들의 인기와 직결된다. 연예인들이 다이어트를 하고, 성형을 하며 늘 외모 가꾸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 이유는 대중의 관심과 사랑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한 자기관리인 셈이다. 이처럼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치인 외모를 가꾸는 모습은 열정적이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연예인처럼 외모를 아름답게 가꿔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치를 찾아 가꾸는 것이 자기관리다. 따라서 뚱뚱하거나, 유행에 뒤떨어진 옷을 입거나, 피부가 깨끗하지 않다고 해서 자기관리를 못한다고 비난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외적인 요소를 가꾸는 것보다 다른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는 사람에게 외모관리는 중요한 자기관리의 요소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외모를 가꾸는 것이 마치 보편적인 자기관리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중매체에 나오는 이미지에 침식당한 이들은 불행히도 외모를 가꾸어야만 자기관리에 성공했다고 여기는 듯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뚱뚱하거나, 지나치게 마르고 왜소하거나, 화장이나 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을 자기관리에 소홀한 사람으로 몰아가며 한심하다고 비난한다. 
   취업을 하기 위해 성형을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성공을 위한 외모관리는 필수코스까지 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잣대에 휩쓸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규정해놓은 자기관리의 기준에 미칠 때까지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이는 남이 정해놓은 기준에 맞춰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외모를 가꾸는 것을 자기관리라고 지칭하는 모순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나’를 위한 자기관리
   외모관리에 치우친 자기관리 외에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데 급급한 허울뿐인 자기관리 또한 스스로에게 독이 된다. 남들처럼 학점관리를 열심히 하고, 토익학원을 다니고, 스펙을 쌓고, 외모를 가꾸지만 그 목적이 남들 눈에 비춰질 내 모습을 의식해서라면 결국 그것은 나를 위한 자기관리가 아닌 것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 남을 따라하는 자기관리는 진정한 자기관리가 아니다

   본인의 자기관리 목적과 가치기준을 분명하게 세워놓지 않고 그저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이 불안해 무작정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추는 자기관리는 목적지 없이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항해와 같다. 단순히 자기관리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옭아매는 것이다. 남들도 대외활동을 하니까 나도 대외활동을 해야 하고, 남들도 입으니까 나도 유행하는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이 하는 자기관리가 마치 정답인 양 그대로 답습하려 하고 그게 옳은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정작 ‘나’를 위한 자기관리에 대해선 깊게 고민해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성공사례에 얽매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사이, 진정한 ‘나’는 멍들고 있는 것이다.

   가치의 차이일 뿐
   반드시 하루를 시간단위로 쪼개 그날의 할 일을 모두 달성해야만 성공적인 자기관리를 한 것은 아니다. 165cm에 48kg이 아니어도, 탄탄한 복근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어학연수 한번 다녀오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만족스러운 일을 했다고 자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자기관리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어떻게 나 자신을 위한 관리였는가’의 여부다. 누군가에겐 외적인 부분을 가꾸기보단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더 철저한 자기관리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각자 인생의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가 다르듯이, 성공적인 자기관리의 척도 또한 다르다. 성공적인 자기관리의 일반적인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그 기준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관리의 시작은 자신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돈이 될 수도 있고, 외모가 될 수도 있고, 공부가 될 수도 있다.
 

   포세이돈의 아들인 프로크루스테스의 집에는 쇠침대가 있었다. 그는 지나가는 행인을 잡아 침대에 뉘이고는 침대의 크기에 맞도록 키를 늘리거나 다리를 잘라 행인을 죽였다. 그러나 그 침대는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장치가 있어 침대의 길이와 같은 키를 가진 사람은 있을 수 없었다고 한다. 불행히도 이 잔인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현대 사회에 존재한다. 기준 없이 남들을 좇는 자기관리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만큼 위험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올라가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외면을 중시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외모라면 외모를 열심히 가꾸는 것이 철저한 자기관리다. 다만 본인의 자기관리 기준과 맞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조소하는 일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나와 타인의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진짜 ‘나’를 위한 자기관리의 첫 걸음이 될 수도 있다.


유정현 기자 yjh13@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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