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크고 잘생긴 예안리 사람들 국제교류에도 나서

   ‘예안리 고분군 유적조사보고서’(부산대 박물관 1985년 발간)에 따르면, 예안리 인골들은 대개 다른 고대의 유골들보다 장대한 기골이 특징이다. 평균 키는 남성이 164.7㎝, 여성이 150.8㎝로 일제시대 중부 이남 사람들의 평균 키보다 크다. 전체 사망자 중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고, 청·장년층의 사망률이 높다. 또한 11세 이하 어린이 사망자가 확인된 것만 전체의 4분의 1에 달했다. 당시의 높은 유아사망률은 의료수준이 낮았던 고대사회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가야인 인골의 복원 과정  〈출처:가야문화재연구소〉

다양한 질병에 시달려 그러나 평화로운 시대
   인골들 중에는 관절이 정상인보다 굵고 척추가 늘어난 경우가 적지 않다. 척추 디스크를 앓은 흔적을 보인 인골도 있다. 이 경우 삐져나온 뼈가 신경을 건드렸을 터이니 당사자는 상당한 통증에 시달렸을 것이다. 뼈가 부러지고도 치료를 못해 뼈 모양이 비정상적으로 변한 것도 있다. 정상적인 인골에 비해 대퇴골 관절이 훨씬 큰 인골도 있다. 이 경우는 골반에 대퇴골이 완전히 맞물리지 못하면서 고관절 부분이 부어 아마 평생 한쪽 다리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예안리 인골들 중에는 날카로운 이기(利器)에 의한 손상흔, 즉 전쟁 등으로 인한 상처나 사망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4~7세기 김해 예안리는 아마도 평화로운 시대였던 것 같다. 또한 예안리 인골들은 그들이 생전 어떤 음식을 주로 먹었는지까지 알려준다. 당시 사람들의 상당수는 충치를 앓았다. 이는 예안리 인골들의 엑스레이 촬영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이들의 치아는 대개 상아질이 완전히 닳아 있을 정도로 마모가 심했다. 치간의 3분의 2정도가 없어진 경우도 있다. 치아를 많이 사용했다는 뜻이다. 생전에 이가 모두 빠져 잇몸으로 살았을 사람도 있고, 축농증에 시달린 이도 있다. 고름주머니가 생겨 입속에서 골수염이 진행된 경우도 나타난다.
 

국제교류의 흔적
   예안리 고분의 인골들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조개껍데기가 많은 땅에 묻혀 뼈가 썩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안리는 원래 깨끗한 백사장이 있는 모래땅으로, 당시 사람들은 이곳에 생활쓰레기장인 패총을 만들었다. 조개껍데기의 알칼리 성분은 산성 토양을 중화시켜 인골의 부식을 막는다. 조개껍데기가 많이 섞인 토양은 비가 오면 패각의 칼슘 성분이 녹아 모래땅으로 스며들고 땅 속의 인골에까지 탄산칼슘이 충분히 공급되어 최상의 보존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가야인의 원류를 더듬어볼 수 있는 인골은 예안리 외에도 경남 사천시 늑도의 30여기 유구에서도 확인됐다. 학자들은 일본 규슈 북부에서 출토된 기원전후의 ‘야요이 인골’이 예안리 가야인과 같은 형질이라는 사실을 중시, 야요이 토기를 만든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건너갔을 것으로 파악한다. 가야인과 고대 일본인은 2천여년 전부터 교류를 가진 것은 물론 형질인류학적인 공통점까지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김선근 대학원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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