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채꽃과 역사교과서

  봄비가 내리고, 봄소식이 꽃망울 터지듯 들려오는 사월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봄을 노래하는 곳은 역시 남쪽 끝 제주도서부터다. 「여행의 천국」한국의 하와이로 불리는 제주도는 올해도 흐드러지게 피어난 유채꽃들이 육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봄소식과 함게 역사의 아픔을 전해준다.
  누구는 유채꽃을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라고 노래한다. 봄이면 온 제주를 뒤덮는 유채꽃은 4월이면 통곡으로 제주도민의 가슴에 와 닿는다.
  1948년 4월3일 미군정과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식민정책이 자리잡혀 가던때 그와 함께 조국의 분열이 절박한 현실로 다가오고 분단된 단독정부의 수립이 구체화되고 있을때 그것에 대한 반대투쟁의 봉화불이 한라산에서 올랐다.
  제주민 대다수의 지지와 공감속에 전개되던 투쟁은 온 섬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엄청난 물리력의 증강, 평화협정등의 결렬로 인해 제주도에는 그 어느 시기에도 없었던 피의 해일이 몰아닥쳤다. 지금도 제주 어느 마을에 선가는 대부분 집들의 제사가 한날에 지내지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 피의 현장을 전달해 주는 듯하다.
  무자비한 탄압으로 인해, 급기야 제주민중항쟁은 피투성이 재만 남겨놓고 사그러지고 말았다.
  『제주도 4ㆍ3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ㆍ10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해 일으킨 무장폭동이었다. 그들은 한라산을 근거로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약탈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군경의 진압작전과 주민들의 협조로 평온과 질서를 되찾았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는 4ㆍ3을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이땅에서는 분단의 형성기였던 해방공간의 주요한 사건들에 대한 연구는 물론 그런 사실에 대한 언급조차 하기쉬운 일이 아니다.
  대구, 여수, 순천, 제주등지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이 역사학계 일부에서 점차 폭동에서 항쟁으로 대접받게 된 것도 불과 수삼년전의 일인 것이다. 우리의 수난의 역사들이 아직도 제자지를 잡지 못하고 사실 또한 위정자들에 의해 왜곡노력은 우리 역사해석의 커다란 잣대로 사용되어 왔다.
  아직도 「피에 젖은 유채꽃」이 「공산주의자 교란」운운하는 속에 꽃봉오리를 피지 못하는 1991년 4월의 역사기록은 역사교과서부터 고쳐져야 한다.

  <하>

저작권자 © 충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