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이 아니라 번안에 가까운 의역" VS "번역은 번역자의 새로운 창작물"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가 개봉하면 그에 맞물려 원작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게 마련이다. 최근 ‘위대한 개츠비’의 개봉과 함께 원작 소설 역시 베스트셀러로 진입했다. 한 작품에 대해서 하나의 출판사가 독점적인 권리를 갖는 것이 아니기에 번역서적은 판본이 여러 가지이다. ‘위대한 개츠비’만 놓고 보더라도 52개의 판본을 갖는다. 그런데 이런 경우 번역에 대한 상호 비판이 존재한다.
  지난해 말에는 한 작가가 이 작품을 번역해 출간하기도 했다. 그런데 가장 최근에 나온 번역판은 차라리 ‘번안’에 가까울 만큼 의역이 심할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오역이 눈에 띄었다. (<위대한 개츠비>, 문학동네판 역자서문 中).
  미국문학을 전공한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의 지적이다. 여기서 한 작가는 김영하를 가리킨다. 유사한 사례는 또 있다. ‘삼국지’의 새로운 판본을 내면서 역자인 황석영은 당시 국내에서 대표적으로 읽히던 이문열의 삼국지 번역을 비판했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주인공인 이유는 당대 민중의 염원을 반영한 나관중의 역사관인데 이것을 조조라는 승자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은 일본식 유행이며 체제에 복무하는 세계관을 반영한는 비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번역을 하는 것이 정답일까? 많은 이들이 칭송해 마지 않는 문학작품을 번역 판본으로 읽을 때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음을 경험했던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혹자는 사회 문화적인 배경이 너무나도 다른 유럽권의 번역문학보다, 유사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중국과 일본의 문학이 더 잘 읽힌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즉 번역문학은 시대와 언어를 달리하는 독자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문학작품의 번역과 달리 보다 정확성을 요구하는 학술적인 번역에도 난점은 존재한다. 그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개념의 경우 이런 상황이 심각해진다. 서구의 제국주의 침략, 개항의 시기와 맞물려 동양세계에서 번역이라는 임무를 먼저 담당했던 일본의 번역자들은 난관에 봉착한다. 우리가 흔히 개인이라고 번역하는 individual과 상응하는 말이 당시 일본에는 없었던 것이다. 또 사회라고 번역되는 society라는 말 역시 당대의 일본을 비롯한 동양사회에는 없었다. 이런 경우에는 새롭게 조어를 해야 하는 임무가 번역자에서 주어진다. 이렇게 보면 애초에 정확한 번역이라는 건 없는 것이다.
  물론 완변한 번역을 통한 상호 이해의 과정이 필수적인 경우도 있다. 지난 한-EU FTA와 한미FTA의 협정문에도 무더기로 번역의 오류가 밝혀져 졸속 협상과 정부의 신뢰가 추락했다. 국민의 이해관계가 달린 국제협정의 경우는 창작이나 학술처럼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치밀해야 하는 과정이다.
  학문을 업으로 삼는 이들은 번역의 어려움을 모두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조금만 실수하더라도 완전히 다른 의미로 전달이 되거나, 과잉과 축소되어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김영하 역시 <위대한 개츠비> 해설에서 “창작이 전차군단이라면 번역은 지뢰제거반”이라며 번역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또 많은 학술적인 서적의 번역서에 오역과 의역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역자의 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모국어로 쓰여진 고전도 당대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게 재해석되거나 해설을 붙이는 사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의역은 번역의 과정에서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번역에 대한 새로운 판본이 계속 나오기도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김선근 대학원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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