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로당지령 사실무근, 인명피해 80%가 진압군에 의해

  1. 글을 시작하며

  올해 43주년의 불혹으로 접어든 반외세 반독재 투쟁의 4ㆍ3제주항쟁은 「불신분자 빨갱이들의 폭동」등 부정적으로 매도, 역사속에서 사상되어 왔다.
  4ㆍ3항쟁은 반분단 반외세의 민중운동으로서 일본제국주의가 무너진 후 해방이 되자 다시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남북한으로 분할 점령하는 새로운 식민지적 상황에 처하게 됨에따라 미제국주의와 맞서고 통일정부를 지향하는 민중들의 자주의지의 정신사적으로 계승한 민족자주의 항쟁이다.
  제주도 4ㆍ3항쟁의 실제적 규명과 올바른 역사적 조명은 아직도 자료의 빈곤-역사적 진실이 밝혀짐을 꺼리고 있는 권력자들로 인해-과 그로 인한 확실성 타진의 어려움 등의 현실 제약으로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4ㆍ3항쟁 직후의 불문율처럼 금기시 되었던, 또한 천인공로할 대학살을 밝히길 두려워했던 당시와는 달리 지속적인 민중의 투쟁으로 역사의 재인식필요성이 제기되어 왔고 민주화투쟁의 파고인 80년대 이후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왔던, 잊기를 강요받아 왔던 4ㆍ3항쟁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점차 질적 발전을 거듭하며 진행되고 있다.
  40여년 정권의 비호아래 부를 축적한 친일ㆍ친미 기획주의자, 정치권력들, 극우파는 「폭도들의 무모한 사건과 살육의 방지를 위한 군경 진압」, 「민중항쟁이니 해방투쟁이니 하는 것은 좌경화 발상이며 이것은 박헌영의 노선을 추종한 남로당이 일으킨 폭동 등으로 4ㆍ3항쟁을 부정적으로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4ㆍ3항쟁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편향에 의한 역사 왜곡이나 지역적 특수성만으로 규정되어서는 안된다. 일제 식민지하에서부터 해방공간기의 미군정시대의 전개등 한국현대사의 사회구조적 모순의 총체적 인식이 선행 되어야만 한다.
  여기에서는 기존에 왜곡되어 온 주장들에 대해 반박하며 올바로 4ㆍ3항쟁을 조명하고자 한다.

  2. 미군정시대 개막전후

  일본인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으로 제주의 농촌사회의 피폐화와 가중된 조세부담, 산업통제로 「가난한 섬」이 된 제주민은 저급한 임노동자로 전락되어 간편한(?)교통수단을 이용, 식민지 노동력이 필요한 일본으로 가게 되고, 징용, 징병으로 차출되었다가 해방 직후 고향으로 귀환한다. 이들은 민족적 차별과 저임금의 고통속에 일정하게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지녔으리라 여겨진다.
  국방부에서 제시하고 있는 「팔로군의 유입」이나 「해방전의 2배증가」는 사실을 왜곡한 사항-미군정에서 조차 부인-으로 추정되며 약 6만여명의 증가(조선총독부자료)로 제주에 경제적, 사회적 영향을 미쳤다.
  미군정은 대중에 깊이 지지를 받고 있는 전국적 건국준비위 조직과 인민위원회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기존의 식민지 경찰체제를 유지하여 해방후에도 일본군 잔재들의 합법적 무장 행패가 지속되었으며 일제 식민통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그 기구와 사람을 그대로 존속시켰다.
  해방이라 해도 식민지 모순이 그대로 남은 구조속의 제주민의 미군정에 대한 불신은 날로 심해갔음은 당연한 일이다.
  20세기 한국사는 한국민중들이 일제에 시달렸고, 해방과 더불어 미제국주의에 시달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3. 남로당지령설의 허구성

  「제주도반란」의 저자 존 메릴은 남로당지령설에 대해 『본토와 소통이 어려웠고 통일된 전략을 펼 시점이 아니었으며 민중으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기반으로 조직화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유혈사태는 이승만 정권의 책임이며 미군정의 일관성없는 한반도 정책에서 기인했다』고 밝힌다.
  저서 「박헌영」일부에 남로당 지령설을 썼던 박갑동시는 이 책이 잘못된 부분이 많다는 것과 기관에서 수정, 기재한 것으로 「심히 부끄러운 글」이라며 절판시켜 새로 펴낼 예정이라며 지령설을 부인하였다.
  당시 고립되어 버린 제주도는 폭도의 반란으로 규정되고 강력한 미군과 이승만독재정권의 물리력으로 유혈 진압당하였으며 해안선봉쇄등 외부와의 연락이 모두 차단되었던 실상이므로 이러한 낭설은 사실무근임이 자명하다.

  4. 한날 한 마을서 주민 4백명 학살

  40여년전부터 섣달 열여드렛날 조천읍 북촌마을에서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제사인 「무남촌(無男村)의 제사」가 있다. 한마을에서 자행된 대학살사건으로 4백여명이 죽은 한국현대사의 비극인 「북촌사건」으로서 아직까지 정확한 진상규명이 되지 못하고 있다.
  4ㆍ3항쟁이 한창이던 49년1월17일에 주둔군 2연대가 북촌마을 어귀고개를 가던중 게릴라의 기습으로 2명의 군인이 숨지게 되고 마을원로들은 숙고 끝에 시신을 갖고 군인본부로 찾아가나 오히려 경찰 가족 한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당한다.
  「빨갱이 마을」이라고 길길이 날뛰며 3백여채의 가옥을 잿더미로 만들고 1천여명의 주민을 소집하여 경찰, 군경가족은 제외하고 대학살이 오전11시부터 오후5시경 감덕에서 달려온 상급지휘관의 중지명령이 있기가지 계속되었다.
  북촌주민들은 60년대 북촌국민학교에서 대성통곡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소환되었던 이른바 「아이고사건」이후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있다고 한다.
  미군정보 보고서는 매일 제주상황을 기록하고 있으나 유독 이 사건만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있다. 주민 홍형식씨는 「마음놓고 대성통곡이라도 하고 원혼을 달랠 수 있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까지 말하고 있는 실정이다.

  5. 미군비밀문서-80%이상 진압군에 희생

  제주도 4ㆍ3항쟁으로 희생된 인명피해는 얼마나 될까? 「제주경찰사」는 사망자가 9천3백45명이라고 말하고 있고 존 메릴박사는 최소한 3만명으로 1960년 민주당정권시절 국회의원 김성숙씨의 「제주도 양민학살 건의안」은 5만명으로 기술하는 등 논란이 많다.
  제주도경에서 펴낸 「제주경찰사」의 통계는 기존의 주장들보다 현저히 낮게 밝히고 있어 의혹을 던져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북촌사건을 공비의 만행이라고 하는등 왜곡기록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 논란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최근 입수, 폭로된 「제주도사태」를 종합분석한 최초의 미군 문서인 「4ㆍ3보고서」에 의하면 4ㆍ3의 게릴라 진압과정에서 9연대가 1948년말에 중산간부락 모든 주민들이 게릴라부대에 협조적이고 피난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중산간부락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하여 이를 자행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게릴라진압작전이 계속 전개되던 1949년 4월1일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에 의해 작성된 이 「제주도 사태」종합보고서는 주민 1만5천여명이 살해되었으며 이 가운데 최소한 80%가 진압군(보안군)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혀 충격을 주고 있다.
  이 문서는 또한 「일부에서의 게릴라들이 본토로부터 또는 북한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은 증거가 없으며 지속적인 순찰과 공중정찰등 빈틈없는 방어로 외부지원 가능성은 없다」라고 분석,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서 또한 「북촌사건」「일산사건」등 대규모 주민학살사건을 누락하고 있으며 49년 3월 이전의 사망자로 제한하여 기록하였기에 축소 기록한 측면이 많다는 지적이다.
  4ㆍ3의 진상규명에 있어 정확한 인명피해와 학살을 자행한 자들을 분석함에 있어서 공정하지 못하고 소홀히 취급되고 있어 아직가지 확실한 진상이 밝혀지고 있지 못한 실정이지만, 대규모의 인명피해를 낸 유혈진압을 자행한 독재정권과 외세에 의해 제주도는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간직하고 있는 섬이 되고 말았다.

  6. 현대사적 의의

  30여만의 도민 중 8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4분의 1에 이르는 숫자가 숨졌으며 대부분의 생활터전이 일제로부터 해방시켜준다는 우방군(?)미군의 막강한 전쟁물자, 물리력으로 초토화되어 버린 남도의 땅!
  위에서 간략하게 왜곡, 은폐된 사항을 살펴, 보다 더 올바른 시각으로 4ㆍ3제주민중의 반분단 반외세 투쟁을 조명해 보았으나 아직까지도 진상이 규명되지도, 제주도민과 4ㆍ3원혼의 명예를 온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4ㆍ3항쟁은 한반도에서 민중의 자주의지, 민족차지를 가로막고 있는 미제국주의와 반민주적, 반통일적 식민지 대리정권을 뿌리뽑은 그 날에 우리민족의 지난한 민주투쟁은 비로소 승리하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하겠다.

  <김은지 기자>

저작권자 © 충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