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의 정당성과 노동자의 낙관적 확신 그려

  -전태일 문학상 최우수 당선작 「그해 여름」을 읽고

  80년대 역사발전의 필연적인 결과인 87년 7, 8월의 노동자대투쟁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전면적인 대립이었으며 곧 90년대 역사에 대한 민감한 예감이었다.
  그 예감의 빛을 담고 본격화된 노동문학은 우리 문학사의 새로운 시대를 당차게 열어젖혀가고 있다. 노동문학의 발전과 더불어 예감의 빛이 점점 구체화되어가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고 어려울 것이다. 최근에 들어서 다소 그 발전의 속도가 뒤처진 듯한 느낌을 주고 있으나 요즈음 연이어 발표되는 주목할 만한 성과들은 우리의 느낌이 한낱 기우에 불과했음을 밝혀주기에 충분하다. 「민중의 삶이 주체로 되는 문학」으로서의 노동문학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해 여름」을 통해 우리는 이 사실을 기쁨으로 확인한다.
  「그해 여름」은 두가지 점에서 우선 주목된다. 우리나라 노동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해 온 「전태일문학상」의 세번째 수상작이라는 점이 하나이고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마산-창원지역의 어떠함이 나머지 하나이다. 4월혁명을 촉발시켰으며 부마항쟁이 있었고 87년 노동자 대투쟁때 노동운동의 용광로로 뜨거웠었고 지금도 그 뜨거움이 계속되고 있는 마창지역 아닌가.
  이 소설은 이러한 마창지역의 한 단위사업장 노동자들이 어용노조를 거부하고 민주노조를 건설하려는 일련의 감동적 움직임을 기본축으로 하고 있다. 노동소설이라면 흔히 볼 수 있는 이를테면, 해고ㆍ복직투쟁ㆍ구사대와 경찰의 폭력ㆍ투옥ㆍ파업ㆍ점거농성ㆍ단협쟁취 등이 노동자들의 때로는 헌신적이며 때로는 비장하기까지한 활동과 함께 형상화되고 있다. 또한 활동 가운데 겪는 노동자들의 삶의 애환과 좌절, 그리고 소시민적 주제와 갈등을 극복해내는 눈물겨운 노력이 작가의 인간적 애정의 시각으로 그려짐으로써 「그해 여름」은 감동으로 전해진다.
  「그해 여름」은 기존의 노동소설들에서 지적되왔던 것들을 상당부분 극복하고 있다. 개인적인 소영웅주의가 노출되는 결과를 예의 경계하고 있는 것이 그렇다. 전문적이고 전업적인 직업활동가-예를 들면 주성도-의 면모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단위사업장내에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는 초보적인 혹은 「중간」노동자층을 중점적으로 이 소설은 그리고 있다. 그들은-정우ㆍ해철ㆍ영중-민주노조의 건설을 위하여 한발한발 준비해 나가는 과정에서 결국 선진적 노동자로 소설속에서 성장하며 그 모습은 뚜렷하다. 기존의 노동소설에서 보여지던 실수들 즉 영웅적 전형의 주인공이 그의 개인적인 결단에 의해 극적인 상황을 연출해가는 따위를 「그해여름」은 완전히 극복하고 있으며 이는 노동소설의 발전에 매우 유익하다.
  주인공 노동자들을 여럿 등장시킨 이 소설은 그들의 집안내력으로부터, 노동자가 되기까지의 과정,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 인간다운 삶을 위한 여러가지 도전이며 좌절, 갈등 그리고 투쟁 등을 작품 중간중간에 삽입시키고 있다. 노동자들은 이 한도 끝도 없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민주노조건설을 위한 단결과 투쟁으로 모아내며 번민할지라도 끝내 보다 나은 삶에 대한 낙관적 확신을 버리지 않는다.
  파업투쟁에 대한 굳은 정당성과 승리에 대한 노동자의 낙관적 확신을 읽는 것은 큰 기쁨이다. 이러한 낙관적 확신은 끝내 파업투쟁을 거치면서 집단적 낙관성으로 변모하는데 이는 노동소설의 건강성과도 이어진다. 「그해 여름」이 노동문학으로서 자리할 수 있음을 예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위사업장에서의 파업투쟁 중심으로 사건의 지루한 전개에 그치지 않은 것도 이 소설의 장점이다. 마창지역의 입주 공장들-거의 대규모 사업장이다-의 일련의 노동운동 또한 소설은 다루고 있으며 해고노동자인 해철과 소담의 건강한 사랑이야기는 노동자들의 낙관적 확신과 함께 소설속에 어우러져 노동소설을 읽는 기쁨을 한층 더해준다.
  이러한 큰 기쁨과 함께 몇가지 아쉬움도 남는데 이것은 비단 「그해 여름」에 대한 아쉬움만은 아니다. 노동소설이 갖는 큰 내용적 특징이라면 집단적 투쟁의 모습일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을 올바로 견지하고 자신의 생존권적 요구와 전체 민민운동의 대의를 일치시켜 나가는 역동적인 투쟁의 모습이어야 한다.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형상화하는 것만으로 노동소설의 완성에 미치지 못한다. 전민중적 변혁의 시각에서 그려져야 할 것이다. 「그해 여름」은 어용노조의 기만적인 임금인상안을 반대하고 생활임금을 쟁취하기 위한 파업으로 시작된다. 결의는 민주노조의 건설로 모아지고 구사대의 폭력을 물리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결국 이 소설 역시 기본의 노동소설처럼 경제투쟁과 부분적인 정치투쟁의 감만 잡게 해줄뿐이다. 변혁운동에 있어 전위조직으로서의 노동자계급을 이해한다면 노동자들의 변증법적으로 승화되는 과정이 묘사되어야 함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 「그해 여름」처럼 고정된 목표 이를테면 민주노조건설이라는 목표만을 위해 내달리다가 그것을 성취하는 것으로, 또는 투쟁의 결과로서 성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여운으로 남기는 것으로 끝이 난다면 노동소설의 틀이 매우 협소해지고 말것이다. 이 점은 노동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데 중요한 사항이다.
  물론 이런 약간의 아쉬운 점들이 「그해 여름」이 갖는 노동소설로서의 가치를 전면 부인할 수는 없다. 고역에 찬 노동속에서도 가난 속에서도 노동해방에 대한 낙관적 확신을 갖는 건강한 노동자의 편지를 인용해 본다. 작품 끝부분에서 농성 중인 노동자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한 구절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동자로 살아가는 내 인생이 보잘것 없는 삶이라고 스스로 비하하며 한때는 부모님까지 원망했던 저 자신이 이제는 떳떳하게 역사의 주인이며 새 역사발전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고한 노동자의 긍지로 자부심을 가지고 가열찬 전진을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은 끝내 승리할 것입니다.
  .......
  밤이 깊어지니 배가 고픕니다.
  빨리 교섭이 잘 진행되어 동지들과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이라도 넘쳐 환한 세상 왔으면 좋겠습니다.
  빨리 승리하여 고생하고 걱정하는 주름진 어머니의 얼룩진 품속에 파묻히고 싶습니다.

  이인성<영문ㆍ89중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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