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꿈틀거리는 대륙②

  교수들의 봉급은 2백원인데 구두쟁이 수입이 천원이 넘는다고하며 뒷문(부정)에 의해 해결되는 관료주의의 부패성을 비판하는 안내자의 말을 듣는 사이 차는 어느새 역사의 심장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릴듯한 천안문에 도착하였다. 너무나도 낯익은 거리, 6ㆍ4사태의 흔적은 간데 없고 구경나온 외국인들 맑게 갠 광장 하늘엔 독수리 모양의 연들이 날고 있었다. 촬영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렸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거리. 44㏊에 이른다는 광장의 문루에는 모주석의 초상화가 붉게 걸려 있었다. 동서의 길이가 5백미터, 남북의 넓이가 8백80미터에 달한다고.
  광장의 중앙에는 높이가 38미터에 달한다는 人民英難記念魂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면에는 모택동이, 뒷면에는 주은태가 글씨를 썼다는 기념비의 뒷면으로 모택동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광장의 서쪽으로는 우리나라 국회의사당에 해당하는 인민대회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다음날은 중국의 최고 학당인 북경대를 찾았다. 1898년 건립하여 백여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만큼 숱한 역경이 있었으리라.
  1966년에는 모택동이 북경대 학생들을 이용하여 문화대혁명을 가속화 시켰고 19C후반 5ㆍ4운동을 주도하는등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학교라 한다. 북경대 교수로 부터 여러가지 설명을 들었다. 4백8만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고, 기말시험을 치를때 학생들도 교수들을 평가하는 소감서를 함께 제출하며 학생들은 2주일에 한번씩 교수들과 회의를 통해 학사 운영에 참여한다고 하니 말대로라면 상당히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국의 개방정책을 설명하면서도 「최초의 사회주의 개혁」임을 강조하고 동구와의 차이점은 개혁을 한후 공업의 개혁을 추진하고 정치개혁에 들어갔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소련의 경우는 「최초의 사회주의 개혁」임을 강조하고 동구와의 차이점은 경제의 기초가 되는 농촌부터 개혁을 추진하고 정치개혁에 들어갔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소련의 경우는 「위로부터 아래로의 개혁」이며 경제개혁만을 급속도로 추진하려고 보니 사회가 혼란해 졌다고 비판적으로 설명을 끝맺었다. 좀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정도였다.
  오후에는 마지막 황제의 궁궐로 익히 귀에 익은 자금성으로 향했다. 금빛, 은빛과 붉은 성벽의 웅장함에 또 한번 기가 질리고 말았다.
  명나라때에 돌을 옮기고 청나라때에 이르러서야 조각을 했다는 길이 16미터짜리의 용계단, 마지막황제의 영화끝장면에 관리인의 눈치를 보며 부의가 걷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천황의 기개, 위엄이 함께 조각되어 있는 듯한 사자상들이 궁궐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황제가 군림한 것이면서도 한편으로 황제 역시 9천칸에 달하는 담장속에 갇혀지냈다는 곳이다. 반복되는 성문을 빠져나와 이하원에 들렀다. 여름한철 궁궐로 사용했다는 곳.
  곤룡호, 만수산에 들러 7백미터 이르는 그림 남하(복도)를 걸었다. 지금은 바닥의 보수공사 때문에 호수에 물이 말라 있었다. 서태후가 권좌를 놓고 피비린내나는 살육을 자행하던 곳이라서 그러지 음산한 가운데 이름모를 새한마리만 날고 있었다.
  저녁식사 시간에는 교포 학생과 좌담회를 가졌다. 많이 익숙해진 탓인지 그 늦은 시각까지 나와준 그네들성의가 고마웠다. 돌아오는 차창에 대고 발음도 또릿하게 「10원」을 외치는 중국의 젊은 우표상인은 과히 보기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다음날은 지구상의 인공물로는 가장 크다는 장성을 향해 출발했다. 이곳은 아무리 추워도 눈 구경하기가 힘들다고 하더니 매서운 바람에 눈발이 날렸다. 1만2천리에 달한다는 성벽, 돌과 벽돌을 이용하여 2백년에 걸쳐 보수작업과 공사를 했다는 말답게 아직도 건재하였다. 얼마를 올라다녔는지 계단에 깔린 돌은 움푹움푹 파여 종이장처럼 얇은 곳도 있었다. 그 옛날 중국의 북방을 지키는 장수마냥 성벽에서서 멀리 변방을 바라보았다. 산등성이로 끊임없이 이어진듯한 성벽의 긴 꼬리가 흐트러져 있고 아득히 계속되는 함성이 들리듯 하였다. 중국은 곧 장성과 천안문으로 비유되는 상징성 때문이었을까, 장엄한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옛날 고구려 후예의 명장 고선지 장군이나 된듯한 가분에 스스로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좀더 많은 것을 보고 싶은 욕심에 오후의 자유시간은 눈깜짝할 사이 훌쩍 지나버렸고 중국에서의 마지막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떠나기 싫은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이튿날은 북경공항에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덕분에 홍콩으로 향할 민항기는 몇시간씩이나 지체되었고, 일행은 홍콩에서 하룻밤을 더 묵게 되었다.
  중국을 다녀온 사람들은 흔히 중국의 현재 사는 모습들을 보고 사는 형편이 서울의 60년대 같다고들 한다. 바꾸어 말하면 서울도 삼십여년 전에는 중국과 별로 다를게 없었다는 말이 되는가?
  자동차가 발디딜 틈도 없이 밀려다닌다고 물질적으로 30년 앞섰다고 자랑할만한 일이되는 것일까?
  과거 얼마전 까지만해도 사회주의 국가의 낙후성을 설명하는데 빠지지않고 등장하는 것이 식료품상이나 국여상점에 줄지어 서있는 시민들의 모습이다. 그리고는 생활필수품의 부족현상을 역설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본 바로는 설이라는 명절을 바로 코앞에도 시기였음에도 물건을 못살정도로 붐비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서민들이 백화점의 몇십만원짜리 물건을 사기위해 줄을 서지 않는 것 역시 너무도 당연한 것일까?
  또 한가지 선물을 고르다 놀란 것을 체제의 특성탓인지 그 누구도 억지로 물건을 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불친절하다고 볼 수는 없었고 그저 거래는 적힌대로의 가격만을 확인해줄 뿐이었고 포장이래야 기껏 비닐 끈으로 두어번 묶어 주는 거시 전부였다. 그네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아주는 걸 보면 그 낭비에 아마 놀랄지도 모르겠다.
  농촌 사람이 도시로 이주하는 것을 정책적으로 금지시킨다는 것이 농촌에서 더이상 살수없어 도시로 떠날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는 것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인가? 중국 혁명이 농민혁명에서 비롯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증명하듯 80%를 차지하는 농촌경제를 중시하고 가장 먼저 개방정책을 실시했다는 점과 우루과이라운드 파동으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끊긴 우리 농촌, 그래서 도시의 노점상으로 전락해 버릴 수 밖에 없는 자유를 가진 현실. 물론 그들도 모두들 농촌을 떠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주거이전과 직업선택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다는 점과 전세값어 없이 목을 메는 가장, 최저 생계비에도 못미치는 임금을 받고 있는 우리네 노동자들. 전체인구가 모두 일자리를 갖고 1년간 출산 휴가를 주는 그들과 탁아소에 조차 맡길수 없어 애태우는 우리의 수많은 맞벌이 부부들.
  북경대의 노 교수가 말했듯이 자본주의 체제는 이미 2백년 이상의 역사가 있고 사회주의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으며, 중국은 게다가 자본주의의 물적기반이 없이 출발했음에도 인민들의 입고 먹는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라는 역설에 한번쯤 머리를 끄덕일만 하다.
  그러나 빙산의 일각이라고, 지나가는 낯선 방문객, 유람하는 방랑객이 보았다고는 하나 10억에 달하는 중국인민들을 얼마나 만났으며, 얼마나 넓은 지역을 보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먼훗날을 위해 판단의 선은 여백으로 남겨두는 것이 옳은일이 아닐까?

  강연배(정외ㆍ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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