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부문

  이계천(교육ㆍ4)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백두산 위에 태극기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어렸을적 누구나 한번쯤은 불러봤음직한, 누이 손잡고 뛰놀던 정다운 기억들이 한웅큼 배어나옴직한 먼 기억저편의 노래소리가 앞자리 꼬마의 봄햇살만큼이나 맑은 표정에서 묻어나온다. 초롱 초롱한 눈망울에 입을 삐죽 내밀고 노래부르는 모습이 앙증맞기조차 해 차라리 한번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모습에, 입가에는 저절로 청량감있는 미소가 핀다.
  「4학년」이라는 단어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부담감이 형광등 불빛조차 무겁게만 느껴지게 하던 어느날, 열려진 창문틈으로 도둑처럼 살며시 뛰어든 그러나 강렬한 라일락향기의 유혹이 종이위의 검은 활자들을 미친년 산발한 머리처럼 풀어 헤쳐 놓고서야 주섬주섬 챙기는채 마는채 가방을 둘러메고 발정난 숫캐마냥 컬떡거리며 열차에 몸을 실었었다.
  가끔은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조금은 자유스럽기를 갈구해 보나, 눈뜨고 일어나면 어제의 세상은 단순히 어제로만 있지 못하듯 오늘은 또 더욱 바쁘게 변해가는 세상, 무엇하나 제 의지대로 되어가는 것이 없음을 알때 느껴지는 무기력과 씁쓸한 자학은 빈 소주병을 불러내어 한숨진듯 어릴적고향의 포근한 기억들을 들춰내곤 한다.
  무심히 스쳐가는 유리창 너머의 낯선 풍경들은, 잊혀져가는 초가지붕에 모락모락 피어나던 굴뚝연기만큼이나 해연히 그리운 얼굴들을 진하게 새겨놓기는 하나, 이미 잊고 사는 일들에 익숙해져 버린 머리속에는ㆍㆍㆍ.
  『아저씨! 이거 먹어』
  멍하니 창밖을 주시하던 눈앞에 어느틈엔가, 앞자리 꼬마의 앙증맞은 손에 들려진 바나나가 반쯤 껍질이 벗겨진채로 탐스런 빛깔을 자랑하고 있었고, 어머니인듯 젊은 아주머니가 아들의 행동에 대견한 듯 살풋이 미소를 띄우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천진스런 분위기에 취하여 어색하지 않은 웃음과 함께 바나나를 받아 들고는, 자연스레 무릎위로 걸터앉는 꼬마와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던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름을 묻기도 전에 자기 이름을 알려주고는, 활짝 펴서 다섯살이라는 나이를 알려주던 손가락을 가지고 수시로 창밖을 가리키며 특유의 호기심을 나타내는 아이의 모습에서는 세상의 한 점 티하나 발견하지 못할 만큼 맑은 향기가 배어 나왔다.
  비록, 바나나를 먹지 못하는 사정을 납득시키기 어려워 기차타기전 많이 먹어서 생각이 없다는 거짓말을 해가며 바나나를 돌려주긴 했지만 잠시나마 아이의 모습에 동화되어 편안함을 느껴볼 수 있었다.
  가끔은 바나나를 먹지 않는 자신이 우스울때도 있다. 남자가 식성도 까다롭다는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바나나만 보면 가슴 한구석이 미어져 오는 아린기억을 떨구어 낼 수가 없다.
  핑계로 지금은 그렇게 흔해 빠린 바나나건만, 아버지가 힘들게 비추신 말씀을 그림자없는 메아리로 날려버려야 했으니, 그나마누워계시던 아버지마저 그냥 그렇게 세상을 달리 하시고 말았으니 백번 후회를 하고 눈물을 흘린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
  손발에 난 상처야 꿰메고 싸매면 낳는다고 하지만 가슴에 박힌 못은, 구멍난 가슴은 세상 그 무엇으로, 어떤 방법으로 치료를 하리!
  물처럼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가는 세월만큼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자연의 섭리이지만, 한번 떠나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만큼 엄청난 아픔이 또 있을가!
  하나 둘 나이를 더해가면 조금씩 철이 들어갈 무렵, 너무나 소박했던 아버지의 작은 바램을 차마 들어드리지 못한 것이 가슴 한 구석 너무나 큰 회한의 덩어리로 남아,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은 채 쌓여만간다. 저 시지프스의 바위와 같은 무게로ㆍㆍㆍ.
  이제 바나나라는 과일이 우리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평범한 과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평범한 과일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자식된 도리로서 차마 바나나만큼은 먹을 수 없다고, 먹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조금이나마 죄스러움을 대신 하려는 것은 또한 얼마나 유치한 생각인가? 다시 한번 죄를 짓는 것이나 아닌지ㆍㆍㆍ.
  제 자식을 키워보아야 부모 은공을 알게 된다고 했지만 뒤늦게 조금이나마 철이 들어 부르고 싶은 이름이 지금 이 하늘 아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았을 때, 그 사실이 더 없이 한스럽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마음이 불편해 지금은 외국 농산물 수입의 규제가 완화되고 생활수준의 향상등으로 사시사철 어느때건 마음만 먹으면 바나나 같은 것은 쉽게 구할 수 있지만 한 십여년전만 해도 무척 귀한 과일중의 하나였다. 특히 겨울철에는 희소가치 때문인지 정말로 맛이 좋아서인지 쉽게 구경조차 못할 정도로 가난한 시골 사람들에겐 한번 먹어보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버지도 그랬다.
  전형적인 농촌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흙과 씨름하면서 오로지 자식들 뒷바라지에 당신이 입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마져도 감추어 가며 사셨던 아버지, 항상 거치른 손으로 자식들 매만지며 훌륭한 사람이 되라며 순박한 웃음을 지으시곤 하던 아버지, 자식들의 성장을 채 보시지도 못하고 자연의 섭리인지 평생을 함께 하던 흙으로 돌아가셨다.
  언제나 아버지의 가슴은 넓고 푸근했었다. 어깨 또한 언제나 든든해 보였었다. 병석에 누워계시면서도 자식들 앞에서 작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신임소리마저 안으로 갈무리하시면서 고통의 주름살을 숨기려 하곤 하셨기에, 병석에서도 자식들의 든든한 정신적 지주로 항상 그 넓은 가슴을 열어 놓고 계셨었다.
  그러던 아버지가 어느날인가, 생전에 바나나를 한번 잡숴보고 싶으시다며 말꼬리를 흘리신 적이 있다. 돌이켜 보면 이 얼마나 소박한 촌부의 작은 바램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나 한 겨울에도 딸기를 찾아 헤메던 효자의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자식의 마음이 부모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는 옛말처럼 한겨울이라는 핑계로 쉽게 구할 수 없다는거나 자신감을 잃어갈 때면 종종 아버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고 아버지를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은 아직도 채 철이 다들지 못한 것일까. 한마디 불평도 없이 자식들 위해 모든 고생 짊어지시고도 언제나 넓고 든든한 모습으로 가슴속에 살아계신 아버지가 꿋꿋하게 제 길을 가라고 인도하고 계시는 걸까.
  달리는 창밖으로 오월의 따스한 햇살이 조각 조각 눈이 부시도록 부숴져 내린다.
  곧 어버이날!
  틈을 내어서 아버지에게 한번 찾아가야 할텐데, 지금쯤 아버지의 무덤가엔 그 넉넉한 가슴만큼이나 많은 망초들이 무성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
  맞은편 꼬마가 떠나간 자리로 비춰지는 한조각 바나나 껍질이 긴 여운을 남기며 가슴 속 저 밑바닥에서 잠자고 있는 그리움을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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