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멍까지 쌉사름한 술 이야기

  대학 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술. 우리는 어디서나 쉽게 술을 접하고 즐기고 있다. 그런데 어김없이 나타나서 우리를 긴장하게 만드는 술이 있다. 바로 폭탄주다. 폭탄주는 1970년 미국 항구 노동자들이 만들었다. 이들은 비싼 위스키를 마시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맥주와 섞어 마시곤 했다. 이렇게 섞어 마시기 시작한 술이 현재 폭탄주다. 자, 다른 술들의 과거도 궁금하지 않는가.

 
  고려에 소주를 전파한 몽골
  한국 사람은 술 하면 제일 먼저 소주를 떠올린다. 실제로 〈한국경제신문〉에서 우리나라 사람 중 65%가 국민 술을 소주로 답했다. 그 정도로 소주를 선호하기에 이를 우리나라 술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소주는 우리나라 술이 아니다.
  소주는 원래 몽골 술로 아라크라 불렸다. 소주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13세기다. 당시 소주는 상할 염려가 없고 가벼웠으며 도수가 높아 추위를 이겨내는 데 도움이 돼 유목민들이 주로 이용했다. 칭기즈칸의 군 역시 소주가 담긴 가죽 부대를 차고 다녔는데 이때 소주가 우리나라에 전파된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국민 술은 아니었다. 고려시대 때 소주는 곡식이 원료인 값비싼 술이었다. 때문에 서민들은 접하기 어려워 귀족들의 사치품이라 불렸다. 그랬던 소주가 국민 술이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 값싼 수입산 당밀로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 후 시간이 흘러 1970년대부터 가격이 떨어지며 소주는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달래주는 친구가 됐다. 
 
  대항해시대 선원들이 목숨처럼 아꼈던 럼주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조니 뎁이 맛있게 마시던 술을 기억하는가. 그 술은 대항해시대 때 뱃사람들이 물처럼 마셨던 럼주다. 최진희 칼럼니스트는 “럼주는 미국 개척시대 초 제조됐다. 처음 만들어진 곳은 카리브해의 서인도제도로 현재 쿠바에서 생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항해시대 당시 식량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식수였다. 그런데 식수는 나무통에 보관했기 때문에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금방 오염됐다. 럼주는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였다. 알콜은 병균과 곤충이 꼬이지 않아 오염될 염려가 적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대륙이 개척된 후에는 신대륙과 유럽을 잇는 카리브 해에서 럼주가 만들어졌기에 보급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럼주는 많이 잊혀졌지만 쿠바에서는 여전히 사랑받는 술이다.
 
  권력, 파업, 전쟁 그리고 맥주
  우리는 가장 사랑받는 음식의 조합으로 치킨과 맥주를 손꼽는다. 이외에도 맥주는 다양한 음식과 잘 어울리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소주 다음으로 사랑받는다. 하지만 맥주는 쓰라린 아픔을 가지고 있다. 온갖 역사 속 난투에서 이리저리 치인 술이기 때문이다.
  술 박물관 리쿼리움 이종기 관장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술은 단연 맥주로 그만큼 얽힌 이야기들도 많다. 특히 독일인에게 맥주는 그저 단순한 술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독일 역사에서 맥주는 여러 차례 폭력을 수반한 술이었다. 특히 맥주 값이 인상될 때마다 독일 곳곳에서 폭력과 난투가 벌어졌다. 이유는 크게 두가지인데 하나는 맥주의 원료인 맥아 값의 인상이다. 당시 독일인에게 맥주는 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때문에 소비자들은 국가가 인상한 맥주 값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또 다른 요인은 맥주 공장의 열악한 환경으로 고생하는 노동자들의 원성이다. 결국 맥주 값 인상으로 화난 소비자와 열악한 환경의 노동자가 만나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1720년대 슈테틴에서 일어난 맥주 불매운동이 있다. 당시 약 3천명의 엄청난 무리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사상자도 수백명에 달했다.
  하지만 맥주의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맥주는 전쟁에도 사용됐는데 세계2차대전 때 군인들의 고통을 잊게 해줬다. 하지만 후에 죄책감 없이 잔인하게 학살하는 모습들 때문에 애꿎은 원성을 듣기도 했다. 비록 이리저리 치였지만 맥주는 유럽인과 역사를 함께해온 술임이 분명하다.

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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